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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훈 칼럼

대통령의 두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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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장훈 중앙대 교수·본사 칼럼니스트

장훈 중앙대 교수·본사 칼럼니스트

#1 지난주 캠프 데이비드 회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윤석열 대통령의 표정은 두 가지를 말하고 있었다. 하나는 2차 냉전 시대를 헤쳐 갈 대외전략의 큰 그림을 완성했다는 자부심. 다른 하나는 별반 달라지는 일이 없는 국내 정쟁을 떠올리면서 드는 피곤함, 외면하고 싶은 마음.

모든 대통령은 내심 대통령직의 두 얼굴(외교와 내정)이 매끈하게 분리되기를 바란다. 대외적으로 국가의 이익·위신을 추구하는 외교 전선에서 대통령은 국익의 수호자로서 자유롭게 ‘역사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믿는다. 나아가 국내정치의 분열과 혼란이 국익을 논하는 근엄한 외교무대를 ‘오염’시켜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캠프 데이비드의 한적한 숲속에는 가짜 뉴스도, 삼각지의 확성기 소리도 들리지 않았을 터.)

외교와 내정의 분리는 가능할까
소통이 내정과 외교 선순환 조건
시민 지지가 한미일 협력의 관건
국회·시민사회에 두루 설명해야

#2 윤석열 대통령 역시 외교와 내정의 분리를 누구보다도 열망하고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에 대해 두 가지 논점을 짚어보려 한다.

①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은 외교와 내정의 분리라는 우아함을 누릴 수 없다. 원론적인 얘기지만, 대통령의 모든 권력 기반은 국내정치에 있다. 선거를 통해 막대한 권력을 준 것은 국내정치다. ②외교와 내정이 분리될 수 없으니 야당의 협조를 구하라는 상투적 주문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좀 더 넓고 긴 호흡에서 외교와 내정의 선순환을 모색해야 한다. 윤 대통령으로서는 캠프 데이비드 원칙이 신냉전 시대 우리의 생존전략이라는 점에 한 점 의심이 없겠지만, 중대한 외교적 결단은 국내 정치과정이라는 험난한 시험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한때 요란했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전임자들의 ‘동북아 균형자론’(노무현 정부),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운명을 돌아보라. 캠프 데이비드 원칙이 윤 대통령의 굳건한 신념의 소산이라면 그 합의 도출에 쏟은 만큼의 에너지와 정열을 국내 이해당사자들을 설득하는 데에 쏟아야 한다. 화려한 외교무대와 처절한 국내정치라는 이질적인 두 세계를 잇는 것은 대통령 권력의 숙명이다.

#3 먼저 외교와 내정이 분리될 수 없다는 교과서적인 얘기를 윤 대통령이 존경하는 정치인 처칠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때는 1945년 2월(4~11일), 장소는 크림 반도 남쪽의 휴양지 얄타. 독일과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우세가 굳어지자 승전 연합국인 미국, 영국, 소련의 지도자들은 얄타에 모여 전후 질서를 둘러싼 치열한 외교전쟁을 벌였다.

전후 독일의 처리방안, 동유럽의 국경선 획정 등을 놓고 치열한 수 싸움을 벌이던 처칠 수상은 불현듯 스탈린에게 신세 한탄을 털어놓았다. “나는 다음번 회담에 오지 못할 듯하오.” 나치즘의 괴물에 맞서 영국과 유럽을 구한 전쟁 지휘관인 처칠이 다음번 회담에 못 나온다니? 독재자 스탈린으로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충격이었다.

2차 대전 종전의 와중에 실시된 1945년 7월 하원 선거에서 영국 유권자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처칠의 보수당을 버리고, 복지국가, 의료 국유화, 실업 대책 등을 약속한 노동당에 다수 의석을 안겨주었다. 전쟁은 끝났고 승리에 대한 보상보다는 미래 삶의 질이 더 중요했다. 결국 1945년 7월의 포츠담 회담 중간에 영국 대표는 처칠에서 노동당의 애틀리 수상으로 바뀌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민주정치의 리더들에게 외교와 내정의 분리라는 여유로움은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

#4 그렇다면 캠프 데이비드의 원칙과 합의가 2차 냉전시대의 대외 전략으로 생존하려면 국내 정치에서 어떻게 소화되어야 하는가?

첫째, 먼 훗날 역사가 캠프 데이비드의 외로운 결단을 평가해주리라고 믿는 방안이 있다. 험악한 우리 정치 현실 속에서 이는 낭만적인 희망에 불과하다. 둘째, 이제라도 야당과 협치를 추진해서 신외교 노선에 대해 초당파적 접근을 해야 한다는 조언도 있다. 하지만 요즘 민주정치의 한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야당과 직접 대화하기는 타협정치의 지존이었던 김대중, 김영삼 대통령에게도 어려운 과제였을 것이다.

필자가 권하고 싶은 방안은, 진부하게 들리겠으나, 폭넓은 대화다. 윤 대통령이 직접 국회의장단, 여야 원내대표들에게 캠프 데이비드 정신과 원칙에 대해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한다. 아울러 레거시 언론과 뉴미디어를 통해서도 캠프 데이비드에서 있었던 일들을 적극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예를 들어 구독자 276만 명의 중도 유튜브 경제 채널 ‘슈카월드’도 지난 주말 캠프 데이비드 회담 해설을 긴급 편성했었다. 하지만 진행자는 합의 내용을 요약 해설만 할 뿐, 방송 내내 중립적 태도를 유지하였음을 유의해야 한다.

윤대통령의 적극적인 소통은 단순히 신외교전략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는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다. 대립, 기만, 적개심으로 이미 혼수상태에 빠진 우리 민주정치에 산소를 공급하는 일이기도 하다. 민주정치가 숨을 쉬어야 캠프 데이비드 정신이 오래 살아남을 여지도 넓어진다.

장훈 중앙대 교수·본사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