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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성희의 시시각각

한 시사 프로그램의 오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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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건 아마도 K팝의 대표 스캔들이자 방송 저널리즘의 대표 스캔들로 기억될 것 같다. 한 달 넘게 연예계를 넘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4인조 걸그룹 피프티피프티 사태의 불똥이 SBS ‘그것이 알고 싶다’로 튀었다. 소속사 어트랙트와 전속계약 해지 분쟁 중인 피프티피프티 사태를 다룬 ‘빌보드와 걸그룹-누가 날개를 꺾었나’(19일 방송) 편이 일방적으로 멤버들을 감싼 편파·부실방송이라는 논란에 휘말린 끝에 방송 5일 만에 사과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SBS 시청자 게시판 항의 글이 4000개가 넘고, 한국연예제작자협회와 한국매니지먼트연합도 항의 성명을 냈다. SBS는 물론이고 국내 TV 탐사 프로의 간판인 ‘그것이 알고 싶다’의 30년 명성에 크게 금이 갔다.

지난 19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빌보드와 걸그룹-누가 날개를 꺾었나’ 편에 등장한 그룹 피프티피프티. 해당 방송은 편파보도라는 시청자 항의가 빗발쳐 방송 5일 만에 사과문을 냈다. [사진 SBS 캡처]

지난 19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빌보드와 걸그룹-누가 날개를 꺾었나’ 편에 등장한 그룹 피프티피프티. 해당 방송은 편파보도라는 시청자 항의가 빗발쳐 방송 5일 만에 사과문을 냈다. [사진 SBS 캡처]

 중소 기획사 소속 신인으로 빌보드에서 약진한 피프티피프티는 ‘중소돌의 기적’으로 불렸다. 빌보드 바람이 분 지 석 달 만에 소속사를 상대로 전속계약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고 활동을 중단했지만, 노래 ‘큐피드’는 여전히 빌보드 ‘핫 100’ 20위권에 있다. 전형적으로 가수보다 노래가 유명한 경우다. 퍼포먼스 중심의 기존 K팝과 달라 K팝인 줄 모르고 즐기는 외국인도 많다.
 통상 아이돌의 전속계약 분쟁은 기획사의 갑질과 불공정 노예계약으로 받아들여져 여론의 지지를 받는데 이번 경우는 달랐다. 외부 세력에 의한 템퍼링(계약 중인 아티스트 빼가기) 의혹이 불거졌고, 피프티 측이 내건 계약해지 사유가 통상적인 아이돌 문화ㆍ산업의 관행에 비추어 이례적이어서다. 아이돌의 실력뿐 아니라 인성과 선한 영향력이 중시되는 게 K팝이다. 사태가 기획사의 갑질이 아니라 정의와 신의의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걸그룹 ‘피프티’ 보도 5일 만에 사과
‘그것이 알고 싶다’ 30년 명성 먹칠
짜인 선악구도, K팝 이해부족 겹쳐

  ‘그것이 알고 싶다’의 참전은 상황을 악화시켰다. 소송 중이라 양측의 입장이 첨예하게 엇갈리는데 이미 정황이 드러난 핵심적 쟁점과 의혹들은 제대로 다루지 않은 채 ‘어른들의 욕망이 아이들의 꿈을 꺾었다’는 감성적 결말로 달려갔다. 애초부터 선악이 명백한 구도였다. 크로스체크도 게을리했다. 소속사의 태도를 문제 삼은 멤버 부모와 내부 제보자의 주장은 금방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음원 수익 정산을 비전문가의 주먹구구식 추측에 맡기고, 진행자 김상중은 그래미상과 에미상을 헷갈리는 어처구니없는 멘트도 했다.
  ‘그것이 알고 싶다’는 2020년 음원 사재기 보도(’조작된 세계-음원 사재기인가, 바이럴 마케팅인가?') 때도 엉뚱한 아이돌을 사재기 그룹으로 지목했다가 논란이 되자 뒤늦게 사과했다. K팝 팬덤의 상식이라 할 ‘음원총공’에 대한 이해 부족의 결과였다. K팝 팬들 사이에서는 연예계나 아이돌 이슈를 잘 모르는 ‘그것이 알고 싶다’가 매번 계몽주의적 시선으로 참전해 사안을 호도한다는 불만이 많다. 한 K팝 팬은 “그간 명확하고 악질적인 불공정 계약 사례가 있었는데 그때 ‘그것이 알고 싶다’는 뭘 했는가”라고 물었다. 제작진이 사과문에 쓴 대로 이번 방송이 '지속 가능한 K팝을 위한 고민'이었다면 사안의 시시비비부터 가리는 게 정석이다. 취약한 중소 기획사는 물론이고 K팝의 덩치가 커지면서 향후 해외자본 등의 템퍼링이 시장을 교란할 가능성이 충분한데, 의혹이 사실인지 아닌지 애써 외면했다.
 대신 ‘K팝 비즈니스는 도박판이고 아이돌은 피해자’라며 엔터 업계를 내려다보는 정형화된 시선, ‘피프티=배신돌’이라는 대중의 시각과 차별화하려는 욕망이 무리수를 낳았다. 이쯤 되면 정보를 모아 결론을 내는 게 아니라 결론을 내놓고 정보를 맞춘 격, 법적 분쟁 중인 일방에 유리한 근거를 만들어준 꼴, 시사 프로 제작진의 엔터 산업에 대한 편견의 산물이란 비판을 면키 어렵다. ‘그것이 알고 싶다’는 후속 방송을 예고했지만, 냉소적 반응이 많다. 멤버들은 프로그램 말미에 나온, 제작진에게 쓴 손편지에서 “PD님 말씀대로 방송을 통해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것이 알고 싶다’의 명예회복도 쉽지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