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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 아내의 섬뜩한 얼굴…“난 아직 광기에 목마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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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잠’은 주연 정유미의 표정만큼이나 다양한 얼굴을 한 영화다. 잠잘 때의 무서운 행동을 다룬 호러, 수수께끼를 푸는 미스터리, 또 악몽 같은 상황을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스릴러로도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부부의 사랑을 다룬 멜로, 심지어 코미디로 보기도 한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잠’은 주연 정유미의 표정만큼이나 다양한 얼굴을 한 영화다. 잠잘 때의 무서운 행동을 다룬 호러, 수수께끼를 푸는 미스터리, 또 악몽 같은 상황을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스릴러로도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부부의 사랑을 다룬 멜로, 심지어 코미디로 보기도 한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누가 들어왔어.” 잠꼬대처럼 낮게 깔린 남편의 한 마디에 모든 게 달라졌다. 만삭의 몸으로 식품회사에 다니는 수진(정유미)은 낡았지만 아늑한 아파트에서 단역배우 현수(이선균)와 산다. 거실엔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할 문제는 없다’는 소박한 가훈을 걸었고, 하나뿐인 방에는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한 침대를 놓았다.

흠잡을 데 없는 신혼부부의 일상은 남편이 기묘한 잠버릇을 보이면서 서서히 무너진다. 잠만 들면 딴 사람처럼 변해버리는 남편이 걱정돼 아내는 잠을 잘 수 없다. 자면서 생고기와 날생선을 꺼내 먹고, 기르던 개를 냉동고에 넣은 남편은 스스로가 두려워진다. 아내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면서 부부는 서로를 무서워하게 된다.

공포나 괴담의 단골 소재인 몽유병과 수면장애를 영화는 영리하게 측면에서 바라본다. 가족 등 주변의 일상은 어떻게 변할까. 좀비나 악귀라면 도망치거나 무찌를 텐데. 가족이 공포 유발자라면 어떻게 지키고 해결해야 할까.

영화 ‘잠’(감독 유재선)은 지난 5월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되면서 처음 공개됐다. “고군분투하는 젊은 커플의 아이를 낳기 전·후에 대한 센세이셔널한 영화”(비평가주간 집행위원장 에이바 카헨), “공포·환상·코믹 같은 장르를 넘나들며 부부와 가족, 믿음과 전통, 의식과 무의식, 과학과 의학에 대한 성찰의 토대를 마련한다”(무비라마) 등의 호평을 받았다.

잠든 남편이 다치지 않게 오븐 장갑을 끼워 주는 신혼부부의 귀여움부터 손가락 끝으로 식칼을 튕기며 밤새 부엌을 지킨 초보 엄마의 예민함까지 오간 배우 정유미(40)의 힘이다. 그를 서울 안국동에서 22일 만났다.

호러·스릴러·코미디… 여러 장르로 본다는 건 배우가 다양한 얼굴을 보여줬기 때문인데. 장르는 뭔가.
“그런 반응이 신기하고 다행스럽다. ‘스릴러의 외피를 두른 러브 스토리’라 하겠다. 사실 처음에 감독님이 이렇게 설명해 준 것에 반했다. ‘한 부부가 자기들 방식대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 나가는 이야기’. 꽁냥꽁냥 하는 것만이 러브 스토리가 아니라는 것. 편견을 깨줬다.”
갈수록 불안해하는 여주인공 캐릭터를 구축하며 중점을 둔 부분은.
“내가 택한 시나리오이고 캐릭터이니 그 안에서 충실히 표현하고자 했다. 너무 많이 생각하면 오히려 방해될 것만 같았다. 내가 ‘이런 표현은 어때요, 저런 건 어때요’ 하면 깔끔한 시나리오에 군더더기가 생길 것 같았다.”
‘잠’은 주연 정유미의 표정만큼이나 다양한 얼굴을 한 영화다. 잠잘 때의 무서운 행동을 다룬 호러, 수수께끼를 푸는 미스터리, 또 악몽 같은 상황을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스릴러로도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부부의 사랑을 다룬 멜로, 심지어 코미디로 보기도 한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잠’은 주연 정유미의 표정만큼이나 다양한 얼굴을 한 영화다. 잠잘 때의 무서운 행동을 다룬 호러, 수수께끼를 푸는 미스터리, 또 악몽 같은 상황을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스릴러로도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부부의 사랑을 다룬 멜로, 심지어 코미디로 보기도 한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여리여리한 외모지만, 뜻밖에 강단 있는 캐릭터를 자주 연기했다. 청각장애 아들을 위해 끝까지 싸우는 인권센터 활동가(‘도가니’), ‘부산행’ 열차 안 좀비 떼로부터 아이를 지키는 만삭의 임산부, 장난감 칼을 휘둘러 학생들을 지키는 ‘보건교사 안은영’,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안은 ‘82년생 김지영’ 등이다.

‘옥자’(감독 봉준호) 연출부 출신 유재선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이번 영화에서도 광기 어린 해결력으로 아슬아슬한 공포감을 선사한다. 그는 “그때그때 오는 것 중 제일 재미있는 것, 끌리는 것을 택한 결과다. 선택의 최우선은 재미다. 하하호호 하는 재미가 아니라 완성도나 연기에서 추구하는 재미”라고 덧붙였다. 봉준호 감독은 ‘잠’을 “최근 10년간 본 영화 중 가장 유니크한 공포영화이자 스마트한 데뷔 영화”라고 호평했다.

신인 감독 장편 데뷔작이다. 봉준호 감독 소개가 있었다던데.
“유명한 분들 전화번호는 이름을 따로 저장하지 않는다. 봉 감독님은 ‘ㅂ’으로 해놓았는데, 어느 날 전화기에 ‘ㅂ’이 떴다. 잠시 설렜는데, 소개 전화였다. (웃음) 시나리오가 후루룩 읽혔다. 너무 재미있어서 유 감독님이 궁금해졌다. 봉 감독님 소개라는 선입관을 지우고 만나려고 했다.”
연상호 감독의 ‘염력’에서 밝은 얼굴로 악행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 연기 장면이 1038만 조회 수를 기록했는데.
“원조 ‘맑눈광(맑은 눈의 광인)’이라더라. 그래서 ‘더 미쳤어야 했나’ 생각했다. 이번 영화도 ‘광기 어린 사투’라고 표현하는데, 가족을 지키기 위한 사투의 한 부분일 뿐 광기라면 아직 갈 길이 멀다. 목마르다.”

겸손한 말과 달리, 푸석한 얼굴과 빨개진 눈으로 불면과 불안을 연기하는 배우의 얼굴은 귀신보다 섬뜩하다. 영화는 칸에 이어 시체스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토론토 국제영화제 등에 초대됐다. 다음 달 6일 개봉. 15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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