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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통 5개 싣고 14시간 달렸다…초유의 제트스키 밀입국 전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6일 밤 해경이 중국인 권평이 중국에서 타고 온 제트스키 내부를 조사하고 있다. 그는 혼자 기름통 5개로 제트스키의 연료를 보충하며 중국 웨이하이에서 인천으로 이동한 것으로 파악됐다. 사진 해양경찰청

16일 밤 해경이 중국인 권평이 중국에서 타고 온 제트스키 내부를 조사하고 있다. 그는 혼자 기름통 5개로 제트스키의 연료를 보충하며 중국 웨이하이에서 인천으로 이동한 것으로 파악됐다. 사진 해양경찰청

“중국에서 왔다. 인천항 근처 다리 동편에서 제트스키(수상 오토바이)를 가지고 있다. 출입국 관리소를 못 찾고 있다”
지난 16일 오후 9시16분쯤 119상황실에 외국어로 신고가 들어왔다. 신고자는 영어로 “중국 산둥반도에서 제트스키로 인천에 왔다”며 구조 요청을 했다. 정우택 국민의힘 의원실이 소방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119 상황 요원이 통역사를 통해 상황을 묻자 신고자는 “한국 유심 카드가 없어서 아이폰 긴급통화로 전화 걸었다”며 자신의 현 위치를 간략히 설명했다. 이어 “물이 곧 차오르면 가라앉을 것 같다. 이쪽으로 오면 푸른색 레이저를 쏘겠다”며 거듭 구조를 요청했다. 출동한 인천 해양경찰과 소방은 이날 오후 10시11분쯤 인천항 크루즈터미널 인근 갯벌에서 제트스키에 올라있는 신고자 중국인 권평(35)을 발견했다. 해경은 출입국관리법 위반 혐의로 권평을 긴급체포됐다. 제트스키를 이용한 밀입국 시도가 적발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제트스키를 타고 중국에서 한국에 온 중국인 권평은 지난 16일 오후 9시16분쯤 119를 통해 소방에 구조 요청을 했다. 자료 정우택의원실

제트스키를 타고 중국에서 한국에 온 중국인 권평은 지난 16일 오후 9시16분쯤 119를 통해 소방에 구조 요청을 했다. 자료 정우택의원실

수사당국 등에 따르면 권평은 지난 16일 중국 웨이하이(威海)에서 출항하기 전 가격대가 약 2500~3000만원 사이인 일제 제트스키를 구매했다. 권평은 제트스키로 중국 동북지방과 산둥(山東)성을 오간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16일 오전 7시쯤 권평은 웨이하이항에서 제트스키에 올라타 헬멧을 쓰고 약 300㎞ 떨어진 인천항을 향해 시동을 걸었다. 짐은 노란색 가방에 담긴 나침반, 망원경, 샌드위치 4개, 물병, 여권 등이 전부였다. 출발 전 그는 25L(리터) 기름통 5개를 로프로 묶은 뒤 선체에 매달았다. 70L까지만 기름을 채울 수 있는 제트스키의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서해 기상 상황이 좋았던 탓에 권평은 어려움 없이 약 14시간 만에 인천항 근처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발견 당시 제트스키엔 기름통이 하나만 달려있었는데 권평은 “다 쓴 연료통은 바다에 버렸다”고 진술했다. 인천해경은 권평에 대해 출입국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홍준서 인천지법 영장 당직 판사는 지난 19일 “도망할 염려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16일 밤 중국인 권평이 중국에서 타고 온 제트스키.일본 회사 제품으로 가벼운 재질로 선체가 구성된 제트스키였다. 약 2500~3000만원 사이에서 가격대가 형성돼 있다. 사진 해양경찰청

16일 밤 중국인 권평이 중국에서 타고 온 제트스키.일본 회사 제품으로 가벼운 재질로 선체가 구성된 제트스키였다. 약 2500~3000만원 사이에서 가격대가 형성돼 있다. 사진 해양경찰청

 수사 당국은 초유의 제트스키 밀입국 시도엔 ①권평이 중국서 출국 금지된 점 ②제트스키 이용 경험이 있는 점 ③한국 내에 가족이 있고 인천 지리에 익숙한 점 ④경제 형편이 넉넉한 점 등이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 권평과 온라인으로 교류해 온 이대선 국제연대 활동가는 “그는 2016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풍자하는 슬로건이 담긴 티셔츠를 입은 사진을 자신의 SNS에 올렸다는 이유로 체포돼 수감 생활한 적 있고 현재 출국이 금지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정치적 탄압을 피해 한국으로 밀입국했다는 주장이다. 권평은 난민 인정신청을 준비 중이다. 지난 23일 사건을 넘겨받은 인천지검 국제범죄사수사부(부장 강석철)은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수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선·무역선에서 보트·제트스키로

국내 밀입국 시도는 10년 전보단 뜸하지만 간간이 적발되고 있다. 최근 10년간 해상에서 밀입국을 시도하다가 해경에 적발된 건수는 총 9건(조력자 포함 34명)이다. 해상 외 수치까지 포함하면 실제 적발 건수는 더 늘 것이란 게 출입국 당국의 설명이다. 해경에 따르면 2010년대엔 어선이나 무역선을 이용한 밀입국이 주를 이뤘다. 2010년 3월 중국인 7명이 중국 용성항에서 출항한 중국 국적 어선에 숨어 밀입국하려다가 군산 해경에 적발됐다. 이들은 알선료로 1인당 6만위안(한화 약 1088만원)을 지불했는데 당시 뱀 480㎏이 담긴 상자 48개도 함께 들여오려고 했다고 한다.

같은 해 5월엔 환승 어선을 이용한 밀입국 시도가 적발됐다. 중국 다롄항에서 북한 원산항으로 가는 대원어003호(어획물 운반선)에 탑승한 중국인 12명이 5월 16일 오후 9시55분쯤 강원도 삼척시 인근 해상에서 환승 어선을 기다리다가 동해 해경에 덜미를 잡혔다. 그해 9월 29일엔 중국인 11명이 중국 대련항에서 인천항을 향해 출항한 상선에 숨어서 국내에 들어왔다. 이들은 인천항 부두 출입문 철책을 넘으려다가 인천항 청원 경찰에 검거돼 강제 출국당했다.

지난 2020년 레저용 모터보트를 타고 서해를 건너 충남 태안으로 밀입국한 중국인이 충남 태안해양경찰서로 압송되고 있다. 그는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 역전지구대를 찾아 자수했다. 사진 태안해경

지난 2020년 레저용 모터보트를 타고 서해를 건너 충남 태안으로 밀입국한 중국인이 충남 태안해양경찰서로 압송되고 있다. 그는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 역전지구대를 찾아 자수했다. 사진 태안해경

2014년 이후 2020년까진 밀입국 시도가 거의 적발되지 않았는데 출입국 당국은 제주 무사증 입국제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분석한다. 제주에 들어온 뒤 불법체류자로 잠적하는 편을 택했다는 것이다. 법무부에 따르면 제주도 불법체류 외국인은 2013년 1285명에서 2014년 2154명, 2015년 4913명, 2016년 7788명, 2017년 9846명 등으로 꾸준히 늘었다. 2019년 1만4732명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가 2020년 2월 코로나 19 여파로 무사증 제도가 일시 중단되면서 2021년 1만1151명으로 줄었다. 단체 관광객에 대한 무사증 입국은 지난 5월 재개됐다.

2020년 5월 태안해양이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일리포 해변에서 발견된 소형보트와 일대를 수색하고 있다. 사진 태안해양경찰서

2020년 5월 태안해양이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일리포 해변에서 발견된 소형보트와 일대를 수색하고 있다. 사진 태안해양경찰서

그러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하늘길이 막히자 해상을 통한 밀입국 시도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2020년 4월과 5월 중국인 21명이 3차례에 걸쳐 충남 태안으로 밀입국했다. 이들은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에서 소형보트나 고무보트를 타고 동쪽으로 350㎞를 달려 충남 태안 해변에 상륙했다. 이들의 밀입국은 2020년 5월 23일 마을 주민이 해변에서 소형보트를 발견하면서 뒤늦게 드러났고  해경은 순차적으로 21명을 검거했다.

권총 살인미수 등 범행을 저지른 한씨가 밀입국 당시 타고 왔던 15t급 세일러 요트. 사진 여수해경

권총 살인미수 등 범행을 저지른 한씨가 밀입국 당시 타고 왔던 15t급 세일러 요트. 사진 여수해경

2020년 9월엔 지명수배 상태였던 한모(40대)씨가 여수항에 입항한 뒤 감시가 느슨한 틈을 타 세관 검사와 출입국 심사를 받지 않고 도주하기도 했다. 당시 해외에서 산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밀입국과 동시에 총기 밀반입을 한 그는 세종시에 있는 지인에게 총을 쏠 맘이었지만 포기하고 자수했다. 밀입국·밀항 수사 경험이 많은 한 해경 관계자는 “최근엔 밀항처럼 밀입국도 거의 적발되지 않지만, 실제로 드러나지 않은 건수도 있을 것”이라며 “출입국당국의 경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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