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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증정신질환자 강제입원 까다로워져, 치료 못 해 ‘방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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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4호 06면

수면 위로 떠오른 사법입원제

지난 23일 서울 신림역 인근 골목에 마련된 흉기난동 사건 피해자의 추모 공간에 한 시민이 찾아 고인의 명복을 빌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3일 서울 신림역 인근 골목에 마련된 흉기난동 사건 피해자의 추모 공간에 한 시민이 찾아 고인의 명복을 빌고 있다. [연합뉴스]

사법입원제 논의가 다시 물살을 타고 있는 것은 중증정신질환자 치료를 개인·가족이 책임지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인형인 줄 알고 (아기를) 던졌다(2014년 부산 영아투기 살인사건)” “경찰이 나를 계속 감시한다”(2016년 오패산 경찰 총격살인 사건)는 등 현실과 망상을 분간하기 어려운 중증정신질환자는 자신이 범죄를 저지른 것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제때 치료를 받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임에도 겉으로 드러난 잔혹성만 부각되면서 극한 상황까지 간 환자의 치료상태는 늘 간과했다.

실제로 서현역 사건을 저지른 최원종도 3년 전 ‘조현성 인격장애’ 진단을 받았지만, 치료를 받지 않았다. 어느 시점에 상태가 악화했지만 혼자 살다보니 이를 본인도, 가족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조현병 진단 이력이 있는 대전 고교 흉기난동 피의자도 치료를 중단한 상태였다. 최근만이 아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의 김모씨는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았지만 가출 후 약물 복용을 끊은지 2개월 뒤 범행을 저질렀다. 2021년 경기 남양주의 20대 조현병 남성의 존속살해 사건은 응급입원을 할 수 없어 보호자조차 치료를 강제할 수 없는 상태였다. 최이문 경찰대학교 행정학과 교수는 “중증정신질환자의 강력범죄 대상은 가족·지인이 77%, 전혀 모르는 사람이 23%로 ‘묻지마 범죄’의 비중은 크지 않다”며 “사법입원제 논의는 치료에 방점을 둬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환자 본인과 보호자에게 온전히 치료 책임을 지운 것은 2016년 정신건강복지법 개정 때부터라는 지적이 나온다. 재산분할 등의 이유로 벌어지는 강제입원이 문제가 되면서 입원요건을 강화한 게 개정의 핵심이다. 승재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개정 이후 강제입원 요건이 까다로워지면서 환자가 치료를 받아야만 하는데 방치되는 결과를 수없이 낳았다”며 “요건 자체가 비현실적이고, 작동을 안 해도 뒷받침할 지자체 인프라 등 복지서비스가 부족해 구멍이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환자가 입원을 원하거나(자의입원), 입원 권유를 받아들일 경우(동의입원)에는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보호입원·행정입원·응급입원 등 비자의입원은 요건이 까다롭다. 보호입원을 하려면 보호자 2인, 소속이 다른 의료진 2인의 동의가 필요하지만 맞추기가 쉽지 않다. 대면진단, 가족상담이 필요한 경우도 있는데 기한인 2주일 내에 결과를 확정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 의료진들의 의견이다. 김영희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 정책위원장은 “보호입원을 하려면 가족관계증명서 등을 입원 당일에 내야 하는데, 보호자 대부분이 60~80대가 많아 인터넷으로 공인인증서 출력이 어려운데다 야간이나 공휴일엔 출력 자체가 불가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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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단체장이 명령하는 행정입원, 경찰 및 의사가 진행하는 응급입원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사실상 본인 또는 보호자가 거부하면 강제할 권한이 없다. 소송 우려도 있어 지자체, 행정기관에선 소극적인 경우가 많다. 이렇다보니 행정입원은 2020년 651건에서 지난해 1031건으로 증가했지만 미진행률은 12.4%에서 19.2%로 늘었다. 미진행 사유로는 본인·보호자의 거부(32%)가 가장 먼저 꼽혔다. 게다가 사법입원제를 통해 강제입원으로 이뤄지는 신체구속은 인권침해라는 반발이 여전히 크다. 신석철 한국정신장애인연합회 상임대표는 “정신질환자라 하더라도 개인의견을 반영할 권리가 있고, 치료를 쉽게 받도록 장치부터 마련하는 게 우선”이라며 “왜 입원부터 시키려 하는지 모르겠다”고 강조했다.

사법입원제를 찬성하는 측에서는 ‘오히려 환자의 인권이나 신체구속을 법적으로 정당한 경우에만 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장치’라고 반박한다. 권준수 서울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의사는 의료적 자문을 줄 수 있지만 치료를 강제할 순 없다”며 “입원치료 등 신체를 구속하는 건 법으로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사법부에서 치료에 개입한다고 비자의적 입원이 늘어난다고 보기도 어렵다. 미국 뉴욕주의 경우 외래치료명령제인 켄드라법이 통과된 후 중증정신질환자의 입원·투옥률이 감소했고, 조기 진단·치료로 전체 사회경제적 비용이 오히려 43% 감소했다. 인권침해 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독일처럼 국가가 환자에게 절차보좌인을 선임해주고 법 조항에 근거해 강제입원 전 환자 본인이 항변할 기회를 반드시 주는 제도도 도입할 만 하다.

다만 우리 사회가 사법입원제를 소화할 수 있는 인프라를 갖췄는지는 의문이다. 인력과 재정이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 기준 상급종합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입원 일당 진료비는 다른 진료과 평균의 39% 수준에 불과했다. 이렇다보니 정신병동 수는 감소세다. 폐쇄병동 수는 2019년 6만4094개에서 올해 5만4620개로 9400여개가 줄었다. 인력 부족 문제도 심각하다. 현재 정신과전문의 1명이 하루 보는 외래환자는 60명으로 해외의 6배에 달한다. 법원에도 정신의학 전문성을 갖춘 판사를 둬야 하는데 판사정원제에 따라 판사 수가 제한돼 있어 충원이 쉽지 않다. 권 교수는 “사법입원제를 적용한다면 영국, 호주의 정신건강심판원처럼 ‘이동형 정신건강심판원’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동형 정신건강심판원’은 이송인력, 순회판사, 정신과 전문의, 시민단체, 보호자 이렇게 3~4명이 팀을 만들어 응급입원이 필요할 시 3일 이내에 직접 찾아 심사하는 제도다. 3~4주 후엔 계속입원이 필요한지 추후 심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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