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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은주의 아트&디자인

월북화가 임군홍, 오랜 세월 기다려야 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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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은주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지금으로부터 4년 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절필시대’라는 제목의 전시가 열렸습니다. 공식 제목은 ‘근대미술가의 재발견1: 절필시대’.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백윤문(1906~1979), 정종여(1914~1984) 등 각기 다른 사연으로 작업이 중단되고 우리 미술사에서 잊혀가던 작가 6인을 재조명한 전시였습니다

그 가운데 임군홍(1912~1979)이 있었습니다. 1940년대 중국 도시의 노점 풍경을 담은 ‘중국 인상’ 등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빛과 색을 화폭에 담고자 했던 유럽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자신이 있던 그 장소의 빛과 색을 풍부한 색채로 표현한 흔적이 남달랐습니다.

임군홍, ‘백합꽃이 있는 정물’, 1930년 대, 캔버스에 유채, 54x45.5㎝. [사진 예화랑]

임군홍, ‘백합꽃이 있는 정물’, 1930년 대, 캔버스에 유채, 54x45.5㎝. [사진 예화랑]

임군홍, ‘가족’, 1950년, 개인 소장. 사진 예화랑

임군홍, ‘가족’, 1950년, 개인 소장. 사진 예화랑

그의 그림 ‘가족’(1950)도 독특했습니다. 가족, 꽃과 도자기 등 세상에서 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한 화면에 모은 이 그림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고, 그가 남한에서 그린 마지막 작품이 되었습니다.

1948년 초 임군홍은 운수부(교통부)의 신년 달력을 제작하며 월북 무용가 최승희 사진을 활용했다는 이유로 검거돼  수개월 옥고를 치렀다지요. 좌익으로 낙인 찍힌 그는 1950년 9·28 서울 수복 때 혼자 북으로 피신했는데, 결국 분단 고착화로 가족 곁으로 영영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임군홍의 아내 홍우순(1915~1982)은 시어머니와 다섯 남매, 그리고 시아주버니까지 여덟 명 가족을 부양하며 살다가 1982년 세상을 떠났고요. 역사가 남긴 상흔, 비운의 가족사입니다.

지금 서울 강남구 신사동 예화랑에서 임군홍 개인전(9월 26일까지)이 열리고 있습니다. 1930~1950년대 작품 120여 점이 전시장 1~3층을 꽉 채웠습니다. 그의 아내가 서울 광장시장에서 채소와 과일을 팔며 보관해온 작품들이 이제야 빛을 보고 있습니다. 1930년대 말 중국 한커우(漢口)에서 10년 남짓 광고사를 운영하며 줄기차게 그림을 그린 한 화가의 열정이 거기 담겨 있습니다.

임군홍의 그림이 이렇게 공개되기까지는 정말 오래 시간이 걸렸습니다. 유족들은 1985년 월·납북 작가 해금 분위기가 고조되던 시기에 국립현대미술관에 임군홍 작품 5점을 기증했습니다. 이후 2002년,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 일부 작품만 공개된 게 전부였습니다.

작가의 둘째 아들 임덕진씨(75)는 “지난 70여년간 저희 집안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일종의 금기였다”면서 “아버님 그림을 이렇게 보여드리기까지 그저 긴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다”고 아파했습니다. 이어 “‘그림 잘 간수해라. 나중에 세상 사람들에게 꺼내 보여주라’는 어머님 유언을 이제야 받들게 됐다”며 “험난한 시대에 예술혼 하나로 진정한 자유를 누린 화가 임군홍을 기억해주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하며 감격스러워했습니다.

임군홍의 1940년 유화 ‘골목인상’. [사진 예화랑]

임군홍의 1940년 유화 ‘골목인상’. [사진 예화랑]

역사의 그늘에 갇혀 있던 화가 임군홍이 지금 우리에게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