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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동 걸린 '리니지 라이크'..."환불해달라"는 유저들 심상찮다 [팩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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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웹젠이 2020년 출시한 게임 'R2M' 사진 웹젠

웹젠이 2020년 출시한 게임 'R2M' 사진 웹젠

넘쳐나던 ‘리니지 라이크(like·같은)’ 게임 시장에 빨간 불이 켜졌다. 법원이 ‘게임 규칙’의 경제적 가치를 인정한 판결을 내놓으면서다.

무슨 일이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61부는 지난 18일 엔씨소프트(이하 엔씨)가 웹젠을 상대로 낸 저작권 침해 중지 등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엔씨는 웹젠이 2020년 출시한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 R2M이 엔씨의 모바일 게임인 리니지M의 시스템을 모방했다며 2021년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리니지M의 시스템을 저작권법이 보호하는 창의적 ‘저작물’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정경쟁방지법이 보호하는 ‘성과물’로는 인정했다. 이 성과를 웹젠이 무단 사용해 엔씨에 경제적 피해를 줬다는 것. 재판부는 웹젠이 엔씨에 10억원을 배상하고, R2M 서비스를 중지할 것을 명했다.

이게 왜 중요해

모바일 게임 시장은 진입장벽이 낮다. 2021년 한해 구글 플레이, 애플 앱스토어 등 자체등급분류사업자를 통해 출시된 게임만 국내에 95만 2185개(게임물관리위원회)다.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수익성이 검증된 게임과 유사하게 만들어 적당한 흥행, 소위 ‘중박’을 노리는 모방 게임이 늘었다. 리니지M은 2017년 출시 이후 구글 매출 기준 5위 이하로 떨어진 적이 없는 인기 게임으로, 올해 누적 매출 5조원을 돌파했다. 게임업계에서 ‘요즘 나오는 MMORPG는 다 리니지 라이크’라고 얘기할 정도로 유사 게임이 많이 나오는 이유다. 그 중 대표 격인 R2M에 대한 소송에서 법원이 엔씨 손을 들어주자 게임업계는 비상이 걸렸다.

‘○○○ 라이크’가 뭐야

특정 게임 이름 뒤 붙이는 '라이크'는 일종의 하위 장르를 의미한다. 크게 인기를 끈 게임이 등장하고 이후 이 게임의 시스템, 문법을 따르는 게임이 이어질 때 붙인다. 일본 게임개발사 프롬소프트웨어의 데몬즈 소울·다크소울 시리즈에서 비롯된 ‘소울 라이크’가 대표적인 예다. 롤플레잉 게임(RPG) 중 극도로 어려운 난이도, 자유로운 전투 시스템 등 소울 시리즈의 특징과 유사하면 소울 라이크로 분류하는 식이다. 대부분 라이크 게임은 게임 진행방식 등 총론에선 원조의 장르적 문법을 따르지만, 각론에선 개성적 시스템, 캐릭터 등을 넣어 차별화하는 식으로 고정 팬을 확보한다. 네오위즈의 글로벌 기대작 ‘P의 거짓’도 소울 라이크 게임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선 한국형 MMORPG의 기준을 만든 리니지M 이후, 리니지 라이크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총론뿐만 아니라 각론까지 유사한, 리니지와 다를 게 없는 게임들이 급증했다는 점이다. 원조의 수익성까지 해칠 지경에 이르자, 엔씨 내부에서도 위기감이 커졌다. 홍원준 엔씨소프트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지난 8일 실적 발표 후 콘퍼런스콜에서 “시중에 리니지 라이크 게임이 매우 많아졌고 기존 IP(지식재산) 매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엔씨소프트는 아힌하사드의 축복 등 리니지M의 시스템을 웹젠의 R2M이 모방했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지난 18일 엔씨소프트의 일부 승소 판결했다.

엔씨소프트는 아힌하사드의 축복 등 리니지M의 시스템을 웹젠의 R2M이 모방했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지난 18일 엔씨소프트의 일부 승소 판결했다.

법원은 왜?

판결문에 따르면 재판부의 판단은 크게 두 갈래다. 하나는 웹젠의 R2M이 모방한 리니지M의 게임 규칙인 ‘아인하사드의 축복’, 무게 시스템 등을 엔씨의 저작물로는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법률상 저작물이 되려면 창작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 예컨대 아인하사드의 축복은 2005년 출시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W)에 나온 ‘버프’ 시스템 등을 변형했다. 다른 시스템들에 대한 판단도 동일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엔씨의 이 시스템이 부정경쟁법방지법이 보호하는 ‘성과물’이라는 점은 인정했다. 현행 법은 상당한 투자와 노력을 기울여 만들어 낸 성과물을 타인이 무단 사용해 경제적 이익을 침해하는 것을 금지한다. 또 재판부는 R2M의 시스템이 리니지M과 유사하다는 엔씨의 주장도 대부분 인정했다. 예를 들면 리니지M의 아인하사드의 축복은 3단계로 구분해 자신의 캐릭터에게 경험치·재화를 차등지급하는데 R2M의 ‘유피테르’ 시스템도 유사하다는  판단이다. 재판부는 엔씨가 2015년부터 총 1000억원 이상 개발 비용을 투자한 점 등을 종합해 웹젠이 엔씨의 경제적 이익을 침해했다고 인정했다. 이광욱 법무법인 화우 변호사는 “저작권법과 달리 부정경쟁방지법은 창작성이 없어도 상당히 노력해 만들어낸 성과라면 이를 보호하도록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웹젠·엔씨의 대응은?

웹젠은 지난 18일 ″웹젠은 1심 판결에 대한 항소를 준비하고 있다″며 ″R2M의 게임 서비스가 실제로 중단되는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법적 대응을 준비 중″이라고 공지했다. 사진 웹젠 홈페이지 캡처

웹젠은 지난 18일 ″웹젠은 1심 판결에 대한 항소를 준비하고 있다″며 ″R2M의 게임 서비스가 실제로 중단되는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법적 대응을 준비 중″이라고 공지했다. 사진 웹젠 홈페이지 캡처

웹젠은 판결 선고 당일 항소장을 법원에 제출했다. 추후 엔씨가 R2M 서비스 중단을 요구할 경우를 대비해 강제집행정지 신청도 할 계획이다. 박광엽 웹젠 게임사업본부장은 커뮤니티 공지글에서 “R2M 서비스가 실제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신속하게 법적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일정부분 타격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게임 이용 전망이 불투명해지자 이용자들이 이탈할 가능성이 커졌다. 실제 게임 커뮤니티엔 공지글 이후 “환불해달라”“과금안한다”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엔씨도 항소할 계획이다. 1심에선 R2M의 매출 규모 파악이 어려워 손해액 중 일부인 10억원만 청구했는데 항소심에선 손해액을 더 늘릴 것으로 보인다. 1심 재판부는 구글플레이 스토어 등에서 R2M이 기록한 총 매출이 7939만 달러(약 1064억 2070만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무늬만 라이크’ 줄어들까

게임업계에선 이번 판결로 유명 게임을 심하게 모방하는 ‘무늬만 라이크’ 게임이 줄어들 것을 기대하고 있다. 국내 대형게임사 관계자는 “게임 출시 전 법무팀에서 게임 간 유사성을 검증하는 기준이 더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최근 게임 시장 경쟁이 격화되면서 관련 분쟁은 이미 늘고 있다. 엔씨는 웹젠 외에도 지난 4월 카카오게임즈와 엑스엘게임즈를 상대로 저작권 침해 중지 소송을 냈다. 이 회사의 아키에이지 워가 리니지2M을 따라 했다는 취지다. 한국저작권위원회에 따르면 2021년 게임 저작권 침해 시정권고 건수는 1만 338건이다.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법원도 게임물 저작권의 보호 범위를 점차 넓혀가는 추세다. 2019년 대법원이 영국 게임 개발사 킹닷컴(팜히어로사가 운영사)이 국내 아보카도엔터테인먼트(포레스트매니아 운영사)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저작권 침해를 인정하기도 했다. 이전까지는 게임 규칙에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 판례를 기점으로 일부 인정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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