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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플] 엔씨-카겜, 초유의 ‘리니지 소송’…K-게임의 딜레마

중앙일보

입력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가 지난 2019년 리니지2M 미디어 쇼케이스에서 발표하고 있다. [엔씨소프트]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가 지난 2019년 리니지2M 미디어 쇼케이스에서 발표하고 있다. [엔씨소프트]

‘리니지 대(對) 리니지 류’, ‘리니지 대 리니지의 아버지’. 대형 게임사 엔씨소프트와 카카오게임즈의 지적재산권 침해 소송이 시작됐다. 소송의 귀추가 주목되는 건, 여기에 K-게임의 속사정과 딜레마가 고스란히 담겨서다.

무슨 일이야 

5일 엔씨소프트는 이날 서울중앙지법에 카카오게임즈와 엑스엘게임즈를 상대로 저작권 침해 및 부정경쟁행위에 대한 민사 소장을 접수했다고 밝혔다. 카카오게임즈의 자회사 엑스엘게임즈가 2주 전 출시한 모바일 MMORPG 신작 ‘아키에이지 워’가 엔씨소프트의 ‘리니지2M’ 지적재산권(IP)를 표절했다는 주장이다.

지난달 21일 엑스엘게임즈가 출시한 MMORPG 게임 '아키에이지 워'. [카카오게임즈]

지난달 21일 엑스엘게임즈가 출시한 MMORPG 게임 '아키에이지 워'. [카카오게임즈]

리니지는 MMORPG의 틀을 제시한 원조 게임으로, 대규모 전투와 경쟁, 아이템 판매를 특징으로 한다. 이와 유사 게임들을 ‘리니지 라이크’로 부르며 하나의 게임 장르처럼 됐다. 그런데 “엑스엘게임즈의 아키에이지 워는 장르적 유사성을 벗어나 리니지2M의 콘텐트·시스템을 무단도용한 수준”이라는 것이 엔씨 측 입장이다. 아키에이지 워는 지난달 21일 출시해 한때 애플 앱스토어 게임 매출 1위에 오르는 등 초반 흥행 호조를 보이고 있다. 카카오게임즈 측은 중앙일보에 “소장 수령 후 정확한 내용을 확인하고 입장을 밝히겠다”라고 말했다.

이게 왜 중요해

게임업계에 표절 논란은 이전에도 종종 있었다. 그런데 이번 소송은 K-게임업계 재편 과정에서 불거졌다는 게 특징. 전통의 강자 엔씨소프트와 신흥 세력 카카오게임즈, 중견개발사 엑스엘게임즈가 저마다의 살길을 찾아 움직인 결과다.

① 엔씨소프트 : 캐시카우 수호해야
‘26년째 리니지 한 우물(1998년 PC 원작 출시)’ 소리를 듣는 엔씨는 포트폴리오 다각화가 절실하다. 글로벌 공략용으로 만든 PC·콘솔 신작 ‘쓰론 앤 리버티(THRONE AND LIBERTY)’를 올 상반기 중 출시하며, 난투형 대전 액션, 수집형 RPG, 퍼즐 같은 다양한 장르의 신규 IP를 연내 순차 출시할 계획.

새 길을 개척하려면, 캐시카우인 리니지 IP 매출이 받쳐줘야 한다. 지난해 4분기 회사 매출의 78%가 리니지 시리즈에서 나왔다. 그런데 ‘리니지 류’ 게임들이 계속 출시돼 리니지 시리즈에 도전하는 형국이다. 게임업계 관계자들은 “MMORPG 게임이 리니지라는 큰 줄기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면서도 “점점 유사한 정도가 높아지니 (엔씨가) IP 보호 차원에서 아키에이지 워를 마지노선으로 생각한 것 같다”라고 입을 모았다. 엔씨는 지난 2021년 게임사 웹젠을 상대로 시작한 리니지M 저작권 침해 소송도 진행 중이다.

라이온하트스튜디오가 개발하고 카카오게임즈가 퍼블리싱한 게임 '오딘'. [카카오게임즈]

라이온하트스튜디오가 개발하고 카카오게임즈가 퍼블리싱한 게임 '오딘'. [카카오게임즈]


② 카카오게임즈 : 비싸게 산 자회사, 상장해야
카카오게임즈는 개발력 있는 중소 게임사를 인수해 IP를 확보하고, 향후 자회사 상장으로 투자금을 회수하는 전략을 펼쳐 왔다. 지난 2021년 ‘오딘’ 개발사 라이온하트스튜디오를 총 1조2000억원에 인수했고, 오딘은 2년 이상 카카오게임즈 매출을 이끌었다. 지난해 라이온하트의 상장을 추진했으나 ‘카카오 또 쪼개기 상장’ 논란과 자본 시장 악화로 불발됐다.

카카오게임즈는 이보다 앞서 2020년 엑스엘게임즈를 인수했다. 자본잠식 상태인 회사의 지분 52.97% 인수에 1180억원을 들였다. 송재경 대표를 비롯한 개발진의 역량을 높이 산 것. 카카오게임즈 입장에서는 엑스엘게임즈가 라이온하트처럼 신작 흥행을 터트리고 이에 기반해 IPO까지 바라봐야 한다.

게임업계에서는 여기서 ‘괘씸죄’가 적용됐다고 본다. 카카오게임즈의 ‘1호 MMORPG 효자’인 오딘도 리니지 류였기 때문. 익명을 요구한 중견개발사 임원은 “오딘 출시 후 엔씨소프트 임원들이 리니지와 비슷하다며 불쾌해한 것으로 안다”며 “엔씨가 벼르던 소송일 수도 있다”라고 했다.

엑스엘게임즈를 창업한 송재경 대표. [중앙포토]

엑스엘게임즈를 창업한 송재경 대표. [중앙포토]


③ 엑스엘게임즈 : 보릿고개를 넘겨야
엑스엘게임즈는 카카오게임즈 인수 3년이 넘도록 흥행작을 내놓지 못했다. 지난해 매출 178억원에 영업손실 313억원으로, 매출은 전년 대비 34% 감소하고 손실액은 2배 이상 늘었다. 송재경 대표는 내년 출시 예정인 PC 게임 ‘아키에이지 2’로 명예회복을 벼르는 상황. 그때까지 보릿고개를 넘길 먹거리가 절실하다.

이번에 출시한 아키에이지 워는 창업자인 송 대표보다 경영자인 최관호 공동대표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엑스엘게임즈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다수의 업계 인사들은 “송 대표는 아키에이지2에 집중하고 있어 이번 게임에는 관여를 거의 안 한 것으로 안다”, “아키에이지 워로 매출을 올려야 한다는 목표를 최 대표가 잡았다”고 말했다.

이걸 알아야 해

이번 사건은 ‘돈 벌려면 리니지처럼’과 ‘새롭고 다양한 재미’ 사이에 놓인 한국 게임의 딜레마를 여실히 보여준다. ‘다양한 게임성’을 요구받지만 당장 게이머의 지갑이 크게 열리는 건 ‘리니지 류’인 게 냉정한 현실이다. 그러나 더 넓은 시장에 나가려면 다양한 게이머를 매료시킬 수 있는 게임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송재경 대표는 엔씨소프트 초창기 리니지를 개발한, 대한민국 MMORPG의 원조 개발자로 꼽힌다. 그러나 송 대표가 엑스엘게임즈를 세워 2013년 내놓은 ‘아키에이지’는 매출보다는 자유로운 스토리 전개에 방점을 찍은 혁신적 게임으로 평가받았다. 게임 내에서 무역을 하고, 재판하고, 범죄를 저지르면 감옥에 갇히는 등 전투에 치중하지 않은 재미를 구현해 그해 대한민국 게임대상을 받았다. 그러나 2021년 내놓은 ‘달빛조각사’가 장기 흥행에 실패하고 캐시카우 역할을 못하자, 회사는 결국 ‘리니지 류’를 택한 것.

‘리니지 탈피’는 엔씨소프트의 과제이기도 하다. 지난달 29일 열린 주주총회에서 김택진 대표는 “앞으로 나올 게임은 다양한 시장에서 이용되도록 새로운 것을 많이 넣고 있다”라면서도 “주식회사이기 때문에 수익 극대화에 대한 압력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