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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컷칼럼

포화 속 사무실 열고, 오토바이 구급차로 산모 구해

중앙일보

입력

강찬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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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대 공적원조 나선 코이카의 활약과 숙제

광복 78년을 맞은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으로 국제사회의 원조를 받아오다 지원하는 국가로 거듭난 유일한 사례다. 정부가 의결한 내년 공적개발원조(ODA) 예산안은 전년 대비 2조650억원(43.2%) 늘어난 6조8432억원 규모다. 사상 최고액이며 증가율도 역대 최고다. ‘글로벌 중추 국가’를 지향하는 윤석열 정부가 공적 원조에 적극적인 탓이다. 원조 실무 핵심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코이카) 직원들의 활동상을 들여다봤다.

내년 원조 예산 6.8조원 ‘역대급’

가성비 높은 맞춤형 원조로 각광

미국·일본도 인정, 3국 협력 성사

커진 덩치에 부족 인력은 늘려야

아시아국 중 유일하게 키이우 상주

 “하루만 먼저 출근했어도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 지난해 8월 키이우에 복귀한 주 우크라이나 코이카 이택근 소장(50)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난해 10월 7일 키이우 중심가 고층빌딩이 러시아에 폭격당해 무너졌다. 이 빌딩에 사무실 임대 계약을 맺은 이 소장이 처음 출근하기 전날이었다. 러시아 미사일이 날아드는 키이우에 상주하는 아시아 국가 원조기관은 코이카가 유일하다. 이 소장과 30대 부소장 2명 등 한국인 3명이 근무 중이다.

 여러해 전 사무소를 설치하고 인력도 수십 명인 일본 국제협력기구(JICA·자이카)는 개전 직후인 지난해 2월 몰도바로 철수한 뒤 돌아오지 않고 있다. 우크라이나 관리들은 “어려울 때 함께 하는 친구가 진짜 친구”라며 고마움을 표하고 있다고 한다.

 1억3000만 달러였던 코이카의 올해 우크라이나 지원액도 지난달 15일  윤석열 대통령의 전격 방문을 계기로 1억5000만 달러로 늘어났다. 고속철도 인프라 점검과 병원 보수, 정부 시스템 전산화 등 5대 지원 프로젝트도 확정됐다. 특히 철도 지원은 현대로템이 보수를 맡은 바르샤바-키이우 간 철도의 고속화를 지원하는 것으로, 우리 기업의 수주 기회를 넓힐 것으로 보인다.

 이 소장의 생활은 말이 아니다. 단전·단수가 이어져 퇴근하면 바로 자고 샤워는 구입한 생수로 시늉만 했다. “지난해 1월 키이우에 사무실을 개소했다가 2월 전쟁이 터져 철수했지만 8월에 복귀했다. 우크라이나를 돕고, 전후 재건에 한국이 참여할 기반을 닦기 위해 용단을 내렸다. 하지만 올 2월 방공망이 가동되기까지 러시아의 폭격이 이어져 반 년간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수백m 지점 건물이 폭격당해 임산부가 숨진 일도 있었다. 하지만 나라에 기여한다는 생각으로 뛰고 있다.”

일본 자이카 관계자에 “코이카 댕큐”

 주 가나 코이카는 지난 3월 개소 13년 만에 경사를 맞았다. 코로나 방역에 기여한 공로로 나나 아쿠포 아도 가나 대통령의 감사패를 받은 것이다. 오승민 가나 코이카 소장 직무대리는 이례적으로 개인 상장까지 받았다.

 가나 코이카는 2018년 가나의 감염병 대응 시스템 지원에 나서 750만 달러를 들여 역학 조사 전문가 160명을 양성했다. “이런 것까지 해야 하냐”는 반론이 나왔으나 감염병 많은 가나 사정을 고려해 밀어붙였다. 이듬해 코로나가 터지자 코이카가 양성한 전문가들은 상황실을 만들어 맹활약했다. 미국산의 반값에다 유지비는 3분의 1인 국산 검진 장비 30만 달러어치도 들여와 확진자 판별에 도움을 줬다. 덕분에 가나는 3000만 인구 중 확진자가 17만여 명에 그쳐 세계보건기구(WHO)의 ‘우수 방역 국가’에 선정됐다. 가나 대통령이 표창을 준 이유다.

 ‘오토바이 앰뷸런스’로 상징되는 맞춤형 원조도 일조했다. 가나 극빈 지역인 동북부는 탄저균이 창궐하는 고온 지대로 난산 임산부나 아픈 유아들이 제때 병원에 후송되지 못해 숨지는 일이 많았다. 선진국들이 구급차를 지원해 줬지만 도로가 비포장이라 고장 나기 일쑤고 유지비도 많이 들어 가동을 멈춘 상태였다.

 2016년 이 지역에 지원을 개시한 코이카는 자동차 대신 오토바이를 구급차로 쓰는 아이디어를 냈다. 자동차 가격의 8분의 1인 4000달러짜리 오토바이 80대를 지원한 것이다. 32만 달러가 들어간 오토바이 앰뷸런스를 5년간 산모들과 5세 이하 유아 47만 명을 대상으로 운영해 커다란 성과를 거뒀다. 유아 사망률이 50%, 산모 사망률은 11% 줄었다. 주민들은 코이카가 지원한 오토바이를 ‘모터킹’이라 부르며 스스로 푼돈을 모아 유지비를 대고 있다고 한다. 오 소장 대리는 “이 지역은 자이카도 지원하고 있어 자이카 관계자가 현장을 찾았는데, 주민들은 ‘코이카 댕큐’를 연발해 동행한 가나 공무원이 당황해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이 지역에선 한국이 대세”라고 전했다.

원조도 한·미·일 협력 시대 개막

 가나의 성과는 공여기관 사상 이례적인 ‘한·미·일 협력’이 성사되는 계기가 됐다. 가나 보건청이 “코이카가 잘 한다”는 칭찬을 연발하면서 미국의 인식이 달라진 탓이다. 오 소장 대리는 “주 가나 미국 국제개발처(USAID) 관계자들이 ‘가나 관리들이 한국을 왜 이리 좋아하나. 코이카 얘기만 하더라’고 묻는 일들이 많아졌다”고 했다. 급기야 지난해 12월 한·미 간에 상호 협력 방안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안보도 협력하는데 원조야말로 한·미 공동이 효율적 아니냐”는 데 양국이 의기투합했다. 두 달 뒤인 지난 2월엔 미국이 “일본도 끼우자”고 제안했다. “원조 선진국인 일본의 경륜도 고려됐지만,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따른 한·미·일 협력 기조에 부응한다는 정무적 판단도 작용한 듯하다”는 게 외교 소식통의 말이다.

 일본은 처음엔 신중한 반응이었지만, 3월 한·미·일 첫 회동이 이뤄졌고 4월엔 협약 체결로 가닥이 잡혔다고 한다. 외교 소식통은 “일본 외무성의 정무적 검토가 작용했고, 윤석열 대통령이 3월 10일 방일해 한일관계를 개선한 것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고 했다. 결국 한·미·일 공여기관은 지난달 26일 가나 수도 아크라에서 3자 간 업무 협력 약정을 체결하고 2000억원을 들여 보건 사업을 추진키로 했다. 이중 코이카 사업비는 160억 여원이다.

 오 소장 대리의 말이다. “USAID와 자이카는 가나에 사무소를 두고 지원한 역사가 각각 66년과 46년에 달한다. 인력도  USAID가 우리의 11배, 자이카도 3배에 달한다. 그런데도 한국이 이들의 파트너가 됐다. 대외비인 예산과 전략을 공유할 만큼 협력의 강도도 높다. 이는 우리의 원조 능력이 입증됐기 때문이다. 정무적 판단만으론 턱도 없었을 것이다.”

가구당 원조 부담, 한 달에 커피 한 잔 값

 올해 한국의 국민총소득(GNI) 대비 대외 원조액은 0.16% 수준이다. 월급 300만원 가구가 한 달에 커피 한 잔 값인 5000원을 원조에 대는 셈이다. 대외 원조국 모임인 개발원조위원회(DAC) 가입 29개국 중  26위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돈이 효과를 낸다. 정영선 코이카 예산실장은 “코이카 집행 원조 예산의 60% 발주를 우리 기업들이 한다. 결국 원조한 돈이 국민경제에 돌아오는 거다 더 늘려야 한다”고 했다.

 윤 대통령의 의지도 강하다고 한다. 기획재정부는 당초 원조 예산 증액에 신중한 입장이었지만, 대통령이 글로벌 중추 국가로서 대외 원조를 늘릴 필요성을 지적하자 액수를 늘렸다고 한다. 장원삼 코이카 이사장은 “우리는 현지 ‘맞춤형’ 지원에 뛰어난 유연성을 발휘하는 데다, 수혜국에서 공여국이 된 유일한 사례라는 점 자체가 개발도상국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고 말했다. 장 이사장은 그러나 “최근 5년간 예산은 62% 늘었지만, 인력은 573명에서 595명으로 3.8% 늘었을 뿐이라 확충이 절실하다”고 했다.

 전 정부 시절 코이카에서 발생한 ‘매관매직’ 척결도 숙제다. 2018~20년 코이카 상임이사를 지낸 친문 인사 송모(60)씨는 임직원 등 22명에게 3억8500만원을 받은 혐의가 감사원에 적발돼 기소된 끝에 최근 1심에서 실형이 선고됐다. 6400만원을 준 대학 선배를 코이카 자회사 대표로, 1000만원을 준 교수를 코이카 임원으로 선임한 의혹도 감사에서 드러났다.

 소식통은 “감사 결과 송모씨는 직원 10여 명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압박한 정황이 드러났다. 매관매직으로 자리를 얻은 이들은 전부 해임됐다. 정권 코드 인사가 공기관 고위직에 올라 부패를 일삼는 관행을 끊어야 한다”고 했다.

글=강찬호 논설위원 그림=임근홍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