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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프리즘] 낭만에 대하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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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3호 30면

박신홍 정치에디터

박신홍 정치에디터

해외축구 시즌이 다시 시작됐다. 기성세대는 잘 실감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2030세대에서 ‘해축 주말 예능’은 이미 대세다. 특히 김민재가 바이에른 뮌헨, 이강인이 파리 생제르맹(PSG)에 입단한 게 또 다른 기폭제가 됐다. 해축 팬들에겐 최근 두 가지 키워드가 화제다. 바로 ‘사우디’와 ‘낭만’이다. 해축이라면 당연히 유럽축구를 의미했지만 사막의 나라 사우디아라비아가 막강한 오일 머니를 앞세워 공격적인 영입에 나서면서 판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실제로 사우디가 올여름 이적 시장에 쏟아부은 돈만 무려 5억 유로(약 7300억원)가 넘는다.

사우디 유혹 뿌리친 손흥민과 메시
권력욕에 눈이 먼 한국 정치와 대비

지난해 말 호날두가 알 나스르에 전격 입단할 때만 해도 일회성 화젯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반년 새 사우디의 위상은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변했다. 왕년의 스타뿐 아니라 현재 기량이 절정에 달한 에이스들도 잇따라 사우디로 향해 축구계를 경악케 하고 있다. 지난해 해축 MVP인 발롱도르 수상자 벤제마가 대표적이다. 사우디는 심지어 최고 인기 스타인 음바페와 네이마르에게도 수천억원의 천문학적 연봉을 제시하며 거침없이 러브콜을 보냈다. 선수 입장에선 2~3년만 뛰면 유럽의 10년치 연봉을 벌 수 있다는 유혹을 뿌리치긴 결코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돈보다 낭만’을 택한 선수 또한 적잖다. ‘GOAT’로 불리는 리오넬 메시는 연봉 4억 유로라는 파격적 제안을 뒤로하고 미국행을 결심했다. 손흥민도 마찬가지다. 사우디 거액 제안설이 불거지자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주장은 (연봉만 보고) 중국에 가지 않는다”는 선배 기성용의 발언을 인용한 뒤 “돈도 중요하지만 난 축구를 더 사랑한다”며 곧바로 거부 의사를 밝혔다. 전설적 골키퍼인 부폰과 골잡이 카바니도 뒤를 이었다. 지금까지 땀 흘려 이룬 성과와 커리어를 명예롭게 마무리하는 것이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라는 게 이들의 공통된 선택 이유였다.

총선 정국이 다가오면서 여의도 주변을 기웃거리는 자들이 급속히 늘고 있다. 문제는 이들 중엔 교수, 기업인, 고위 관료, 각계 전문가 등 이미 돈과 명예를 가진 데 더해 권력까지 거머쥐려는 자가 상당수라는 점이다. 정가에선 이들이 유력 인사들에게 줄을 대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다거나 SNS 등을 통해 인지도를 높이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자들일수록 인격 수양도 덜 됐으면서 최소한의 리더십도 갖추지 못한 채 자리만 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게 여의도 주변의 공통된 평가라는 점이다. 이런 사람이 완장을 차면 권위주의는 물론 소통 부재와 권력의 사유화를 초래할 우려가 크다. 우리 주위를 둘러봐도 권력에 눈이 먼 아재 간부들이 차고 넘치지 않는가. 이들이 조직에 어떤 폐해를 가져오는지 익히 경험하지 않았던가. 여의도는 또 어떤가. ‘새 피’라고 영입했는데 ‘헌 피’로 판명된 사례를 이미 무수히 보지 않았던가.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욕망이 넘쳐 끊임없이 더 많은 걸 바라는 모습을 탐욕(pleonexia)이라 부르며 경계했다. 이제 한국 사회도 정치권의 러브콜을 정중히 거절하고 각 분야의 존경받는 권위자로 남는, 탐욕 대신 낭만을 택하는 문화가 자리 잡을 때가 되지 않았나. 이런 절제의 미학이 확산될 때 정치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수 있지 않겠나.

최백호가 애절하게 부른 ‘낭만에 대하여’ 가사처럼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을 ‘권력’으로 채우려 하는 순간 본인도, 한국 정치도 불행해지기 마련이다. 손흥민과 메시의 낭만 축구는 대중을 환호하게 하지만 사리사욕만 채우려는 한국 중년 아재들의 권력욕은 낭만은커녕 국가적 민폐만 초래할 뿐이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한 배에 실으면 결국엔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배가 침몰하기 십상이다. 그게 동서고금 불변의 세상 이치다.

박신홍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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