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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화 잇단 성공으로 웹툰 대량생산 시대…완성도 떨어지는 비슷비슷한 작품 쏟아져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53호 13면

한국 웹툰 번영 속 위기

가장 성공한 웹소설로 꼽히는 ‘나혼자만 레벨업’의 웹툰 버전이 글로벌 142억뷰를 기록하자 비슷한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위쪽은 웹소설, 아래는 웹툰 버전 썸네일. [사진 각 플랫폼]

가장 성공한 웹소설로 꼽히는 ‘나혼자만 레벨업’의 웹툰 버전이 글로벌 142억뷰를 기록하자 비슷한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위쪽은 웹소설, 아래는 웹툰 버전 썸네일. [사진 각 플랫폼]

내년 아카데미상 출품작으로 선정된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비롯해 ‘마스크걸’ ‘무빙’ ‘D.P 시즌2’…. 요즘 화제의 드라마나 영화는 거의 웹툰 원작이다. 웹툰 특유의 유니크한 소재와 기발한 발상이 흥행의 이유다. 얼마 전 출시되자마자 아시아 차트를 휩쓴 모바일 게임 ‘신의 탑: 새로운 세계’도 2010년부터 지금까지 연재되고 있는 최고의 인기 웹툰 원작이다. 원작 ‘신의 탑’은 2020년 미국과 일본이 합작 애니메이션을 만들 정도로 전세계적 팬덤을 거느린 블록버스터 IP다.

콘텐트 업계에서 웹툰이 IP의 보고로 통한 지는 꽤 됐다. 2020년 이후 ‘킹덤2’ ‘이태원클라쓰’ ‘지옥’ ‘지금 우리 학교는’ 등 웹툰 원작 드라마들이 글로벌 차트를 정복하면서다. 웹툰은 장기 연재를 통한 팬덤이 탄탄하고, 새로운 소재의 진입장벽을 낮춘다는 점에서 영상화에 최적의 환경으로 주목받았다. 영상화 러시에 힘입어 웹툰 산업은 날로 커지고 있다. 2022년 웹툰 사업체 실태조사 결과 지난해 웹툰 산업 매출액은 약 1조 5660억 원으로, 조사가 시작된 2017년(3799억 원) 대비 4배 이상 규모로 성장했다.

그런데 정작 독자들에게 ‘요즘 뭐가 재밌냐’ 물으면 대개 ‘요즘 웹툰 다 똑같다’는 반응이다. 왜 그럴까. 이미 성공한 작품과 비슷한 제목·썸네일을 내세운 ‘양산형 웹툰’이 플랫폼을 도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웹소설 원작의 ‘나혼자만 레벨업’이 대박을 치자 ‘나혼자 만렙뉴비’ ‘나혼자 특성빨로 무한성장’ 등 ‘나혼자’로 시작하는 먼치킨 웹소설이 빠르게 나오고, 그 웹툰 버전이 웹툰 플랫폼을 도배하는 식이다.

종이책 시장의 출판사에 해당하는 CP가 창작의 주체가 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과거 에이전시 역할을 하던 CP가 원작자와 각색자·그림작가·편집담당 등으로 분업화된 집단창작 스튜디오를 꾸려 창작에 직접 관여하게 되자, CP를 통하지 않는 개인 작가는 연재 자체가 힘들어졌다. 실제로 네이버웹툰 기준 CP명으로 연재하는 비중이 전체의 40%다.

문제는 자본의 논리를 우선할 수밖에 없는 CP가 성공확률이 높은 특정 장르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기존 성공작과 유사하게 만들면 조회수가 웬만큼 보장되니, 실제로 로맨스와 판타지 장르를 전문으로 삼는 CP가 전체의 73.1%에 이른다. ‘양산형’으로 도배된 플랫폼에서 독자들은 장르 키워드로 검색할 수밖에 없고, CP는 독창적인 작품에 베팅할 이유가 더 없어지는 악순환이다.

이런 현상은 웹소설 시장과 비슷하다. 플랫폼이 구획한 영역 안에서 작가도 독자도 주류 장르에 몰리면서 로맨스 판타지, 회빙환(회귀·빙의·환생) 등 일명 ‘마스터플롯’을 벗어나지 않는 게 원래 웹소설의 문법이다. 아침드라마처럼 정형화된 클리셰가 당연시되는 이유다. 그런데 웹툰이 OSMU(원 소스 멀티 유스)의 소스로 주목받게 되자, 빠른 콘텐트 공급을 위해 웹소설의 웹툰화가 활발해지면서 웹툰 업계가 웹소설 업계와 판박이가 된 것이다.

웹소설의 웹툰화는 2015년 카카오페이지가 업계 1위 네이버웹툰의 대항마로 ‘노블코믹스’ 서비스를 론칭하면서 비롯됐다. 가장 성공한 웹소설로 꼽히는 ‘나혼자만 레벨업’의 웹툰 버전이 글로벌 조회수 142억뷰를 기록했고, ‘화산귀환’ ‘달빛조각사’ ‘김비서는 왜 그럴까’ ‘사내 맞선’ ‘재혼황후’ ‘황제의 외동딸’ ‘템빨’ 등이 연이어 성공하면서 ‘노블코믹스’는 ‘오리지널 웹툰’을 가릴 만큼 성장했다. 올해 완결된 인기 웹소설 ‘데뷔 못하면 죽는 병 걸림’도 노블코믹스로 제작돼 하루만에 300만뷰 돌파, 카카오페이지 역대 최고 매출 달성 등의 기록을 세웠다.

지금은 원작인 웹소설 생산이 웹툰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스토리 완성도도 따지지 않고 인기 작가의 원작을 입도선매까지 하는 상황이다. CP가 웹소설 원작을 기반 삼아 특급 스태프로 팀을 꾸려 일정 분량을 사전제작해 연재를 시작하고, 궤도에 오르면 에이스 멤버가 다른 작품으로 빠져 나가며 힘을 잃는 게 패턴이 됐다. 만화평론가 박석환 재담미디어 이사는 이런 세태를 건설업에 비유했다. “소비량에 맞춰 생산을 가속화 하다 보니 ‘순살아파트’처럼 무너지는 작품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사실 웹소설과 웹툰은 성격이 다르다. 과거 장르문학과 출판만화는 엄연히 독립된 영역이었고, 각자 뚜렷한 독자군을 가진 개성 있는 장르였다. 웹소설이 태생부터 자투리시간에 소비하는 스낵컬처였다면, 웹툰의 뿌리인 만화는 단순히 영상화를 위한 IP로서가 아니라 나름의 예술성을 인정받으며 단행본을 소장하고 싶은 ‘작품’으로 존재했다. 그러기에 창조적인 작가들의 기발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었다.

웹툰의 오리지널리티는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 실시간으로 웹소설을 각색해야 하는 무한경쟁의 주간 연재 플랫폼에서 하루 평균 10.5시간, 주 평균 5.8일 노동에 몰린 작가들 80% 이상이 ‘작업·휴식 시간 부족’으로 인한 창작 활동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박석환 이사는 “1990년대 스튜디오 시스템화 되었다가 붕괴된 출판만화 시장처럼, 소비 증진으로 독자 눈높이가 높아지면 하향평준화된 시장은 결국 없어지게 된다”면서 “만화업에 오래 종사하며 그 흥망성쇠를 지켜본 사람들은 이미 다음 단계를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답은 플랫폼의 다양화에 있다. 실제로 주간 연재 방식이 아니라 사전제작을 통한 완결형으로 16부작 이하 중단편 웹툰을 서비스하는 새로운 플랫폼 ‘쇼츠(Shortz)’가 10월 오픈을 앞두고 있다. 장르화되지 않은 오리지널 웹툰을 유통하는 대안적 성격의 ‘제3지대 플랫폼’으로, 여기서 성공한 작품을 대형 플랫폼 연재로 이어간다는 복안이다. 연재플랫폼과 공생하면서 개인의 오리지널리티를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이 탄생하는 셈이다.

최근 AI를 이용한 양산형 웹툰이 나와 별점 테러를 당하는 등 AI 활용을 놓고 업계의 진통이 이어지고 있지만, AI는 연재물 시장에서 1인 작가 시스템이 작동하기 위한 대안이 될 수 있다. 광범위한 그림체가 아니라 특정 작가의 스타일을 학습시킨 AI를 1인 작가 시스템 안에서 도구화하면 저작권 이슈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박 이사는 “소비량에 부응하는 생산 속도가 문제라면, 공동창작 시스템으로 양산형 웹툰을 찍어내기보다 오리지널리티를 보유한 작가 1인이 AI를 워드프로세서와 같은 도구로 활용하는 방식이 업계에 이로울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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