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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5벌 옷으로 '법정' 뒤집어놨다...이 여배우의 '은밀한 럭셔리' [더 하이엔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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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배우 기네스 펠트로는 미국 유타주 파크시티 법원에 출석했다. 2016년 발생한 스키 리조트 사고에 따른 송사인데, 정작 사건 내용보다 펠트로의 법정 출석 옷차림이 화제가 됐다. 그는 재판 기간 총 다섯 벌의 의상을 선보였는데, 정숙한 법정에 어울리면서도 고급스러운 차림새로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지난 3월 22일(현지시각) 미국 유타주 파크시티 법원에 출석하는 배우 기네스 펠트로. 이날 그는 크림색 카디건과 큼지막한 가죽 가방을 들고 등장했다. 사진 연합뉴스=AP

지난 3월 22일(현지시각) 미국 유타주 파크시티 법원에 출석하는 배우 기네스 펠트로. 이날 그는 크림색 카디건과 큼지막한 가죽 가방을 들고 등장했다. 사진 연합뉴스=AP

통통 튀는 Y2K 가고, ‘은밀한 사치’ 왔다

기네스 펠트로는 크림색 니트 카디건과 회색 수트, 올리브색 코트와 실크 블라우스 등 평범해 보이지만, 최고급 소재와 간결한 디자인이 돋보이는 패션을 선보였다. 특히 지난 3월 21일(현지시각) 법정 출석 첫날 입은 미국 패션 브랜드 ‘더 로우’의 올리브색 롱코트는 560만원대의 고가에도 온라인 검색량이 폭증할 정도로 시선을 모았다.

이후 펠트로의 법정 패션은 일명 ‘조용한 럭셔리(quiet luxury)’ ‘은밀한 럭셔리(stealth luxury)’로 불리며 최신 패션 트렌드로 떠올랐다. 로고나 브랜드명을 드러내지 않고, 최고급 소재와 간결한 디자인으로 고급스러움을 지닌 차림을 의미한다.

기네스 펠트로의 법정 패션은 '조용한 럭셔리' 트렌드를 수면으로 떠오르게 했다. 사진 연합뉴스=AP

기네스 펠트로의 법정 패션은 '조용한 럭셔리' 트렌드를 수면으로 떠오르게 했다. 사진 연합뉴스=AP

조용한 럭셔리는 요 몇 년간 패션계 큰 흐름으로 자리 잡아 왔던 ‘Y2K(세기말 패션)’나 ‘복고’ 트렌드와 정 반대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배꼽이 드러나는 짧은 상의나 통이 넓은 바지, 알록달록한 색이 특징인 Y2K 패션은 돌출된 개성을 미학으로 삼는다.

솟아오른 어깨의 재킷, 오버사이즈 실루엣과 어글리(못생긴) 슈즈 등으로 대표되는 복고 패션 역시 과장된 멋을 지향한다. 두 스타일 모두 큼지막하게 박힌 브랜드 로고는 필수다. 2016년 즈음부터 시작된 복고 스타일과 코로나19 기간 정점을 찍었던 Y2K 패션 트렌드는 구찌·버버리·발렌시아가 등 로고 플레이를 강점으로 한 브랜드의 부상을 이끌었다.

201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는 '로고' 브랜드의 전성시대였다. 지난 2021년 발표한 구찌 100주년 아리아 컬렉션의 일부. 사진 구찌

201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는 '로고' 브랜드의 전성시대였다. 지난 2021년 발표한 구찌 100주년 아리아 컬렉션의 일부. 사진 구찌

억만장자를 위한 유니클로

조용한 럭셔리의 주요 브랜드로는 에르메스·로로피아나·더 로우·르메르·브루넬로 쿠치넬리·보테가 베네타 등이 꼽힌다. 로고 없이 간결한 디자인과 최고급 소재를 특징으로 하는 이들 브랜드는 대부분 초고가로 일명 ‘억만장자를 위한 유니클로’로 불린다. 실제로 에르메스, 로로피아나 등 관련 브랜드의 국내 매출은 꾸준히 오름세다. 특히 로로피아나는 2021년 897억원에서 지난해 33% 고성장해 1190억원대 매출을 기록했다.

조용한 럭셔리는 한 계절 앞서 트렌드를 제시하는 패션위크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탈리아 막스마라는 지난봄 올해 가을·겨울을 겨냥해 ‘카멜로크라시(The Camelocracy)’ 컬렉션을 선보였다. 막스마라를 상징하는 카멜(낙타) 컬러를 활용, 직물 자체의 고급스러움을 살리고 실루엣을 강조한 제품들이다. 지난 6월에 열렸던 밀라노 남성 패션위크에서 프라다는 간결한 디자인의 흰색 셔츠를 선보였고, 돌체앤가바나는 잘 재단된 테일러링(맞춤) 수트를 선보였다.

막스마라 2023 가을겨울 '더 카멜로크라시' 컬렉션. 사진 막스마라 홈페이지

막스마라 2023 가을겨울 '더 카멜로크라시' 컬렉션. 사진 막스마라 홈페이지

경제 위기 때마다 ‘미니멀’ 유행, 왜?

더 로우 2023 여름 컬렉션. 사진 더 로우 홈페이지

더 로우 2023 여름 컬렉션. 사진 더 로우 홈페이지

경제적으로 위기 상황을 맞을 때마다 패션 업계에서는 전반적으로 단순함을 미학으로 하는 ‘미니멀리즘’이 유행해왔다. 지난 2008년 경제 위기 이후에도 셀린·보테가 베네타 등 간결한 디자인을 추구하는 브랜드가 부상한 바 있다. 2008년부터 2018년까지 셀린을 이끌며 전성기를 구가했던 디자이너 피비 파일로의 컬렉션이 대표적이다. 공교롭게도 피비 파일로는 올가을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 론칭을 앞두고 있다. 때마침 부는 조용한 럭셔리 트렌드를 타고, 다시 한번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란 기대감이 나온다.

불황기에 로고를 드러내지 않고, 실용적이며 단순한 디자인, 좋은 소재로 만든 브랜드가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임지연 삼성패션연구소 소장은 “경제 위기가 불러오는 극심한 빈부 격차가 부유층 소비자들이 ‘숨겨진 럭셔리’ 스타일을 추구하게 한다”고 분석했다. 불평등한 분위기에서 논쟁거리가 될 수 있는 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전략이다.

로로피아나 2023 가을겨울 컬렉션. 사진 로로피아나 홈페이지

로로피아나 2023 가을겨울 컬렉션. 사진 로로피아나 홈페이지

너도나도 드는 ‘로고백’ 말고, 세습된 부 과시

조용한 럭셔리 흐름의 이면에는 시간을 쌓아야만 만들 수 있는 격이 다른 부를 은밀하게 드러내려는 욕망도 감지된다. 로고만 붙이면 쉽게 완성되는 가짜 럭셔리가 아니라, 최고급 소재와 빈틈없는 디자인으로 ‘아는 사람만 아는 진짜 럭셔리’를 추구한다는 얘기다.

이는 최근 유행하는 ‘올드 머니 룩(old money look)’과도 궤를 같이한다. 지난 3월 공개된 미국 드라마 ‘석세션(HBO)’의 영향이 컸다. 드라마 주인공들은 세습된 부를 가진 상류층 스타일을 선보이며 반향을 일으켰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조용한 럭셔리의 뿌리는 팬데믹 기간 이뤄진 부의 통합과 연결되어 있다”며 “순 자산이 매우 높은 그룹이 이미 상품화된 럭셔리(명품)와 차별화하는 움직임”이라고 꼬집었다.

HBO 드라마 '석세션'의 일부. 드라마 속에서 등장하는 '올드 머니 룩' 패션이 화제가 됐다. 사진 HBO 석세션 공식 인스타그램

HBO 드라마 '석세션'의 일부. 드라마 속에서 등장하는 '올드 머니 룩' 패션이 화제가 됐다. 사진 HBO 석세션 공식 인스타그램

‘오픈런’ 피로감…. 본질에 집중

코로나19 기간 동안 성행했던 ‘보복 소비’가 불러온 ‘오픈런(매장문이 열리길 기다렸다가 구매하는 것)’ 등 과시적 소비에 대한 피로감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소비에 탐닉했던 시기를 지나, 소비에 대해 고민하고, 본질에 집중하려는 양상이다. 이는 의식 있고 신중한 소비로의 패턴 변화를 의미한다.

임지연 소장은 “과잉 소비와 소유의 시기가 끝나고 더 적게 소유하는 대신 더 가치 있는 제품을 원하고, 지속 가능한 기준을 가지고 제품을 구매하는 양상이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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