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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음 읽기

고갱의 그림 ‘우리는 누구인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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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태풍이 가고 습습한 법당에 향과 초를 켜놓고 고요히 앉아본다. 거센 비바람에 온몸을 흔들던 처마 끝 풍경처럼 어수선했던 마음을 따라가니, 거기 의문 하나가 남는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라는.

그러다 문득 그림 한 점이 떠올랐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고갱의 작품이다. 오래전, 인생을 논하며 한 스님이 내게 이 그림을 아느냐고 물은 적이 있어 기억한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인생의 흐름을 묻게 하는 명작이다. 나처럼 그림에 문외한이어도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도록, 친절하게 작품 제목을 왼쪽 맨 위에 적어 놓았다. 나이 불문하고 모두가 느낄 만한 인생에 대한 불안한 심리가 그림에 깔려 있는 듯 보인다. 그림을 찾아보며 다시 또 물었다. 나는 지금 어디 서 있을까?

탐욕과 분노에 휘둘리는 인생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나
나답게 사는 오늘이 최고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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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땐 하루가 왜 그렇게 길던지 시간이 안 가서 강가의 해지는 노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앉아있는 날이 많았다. 그런데 어느덧 인생이 짧게 느껴지는 나이가 되었다. 변한 건 젊어서는 남이 내게 준 상처를 곱씹으며 살았다면, 지금은 내가 남에게 준 상처에 대해 생각하고 후회한다. 그리고 이제야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의 원인은 나의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비롯되었음을. 그러니 좀 더 지혜롭게 살고 싶다.

출가자든 아니든 방향만 다를 뿐, 인간의 욕망에는 쉼이 없다. 가끔 자신은 욕심 많은 사람이 아니라고 손을 내젓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게 세속적 잣대에 관심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알고 보면 진실이 아닐 공산이 크다. 초월한 듯 살아도 결국 그 이면에는 명예를 유지하고 싶은 욕망이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인생에서 자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 살펴보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얼마나 휘둘리며 살아왔는지 알 수 있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불편하고 불온한 감정 또한 얼마나 많았던가. 돌아보면 그런 어리석은 마음작용이 인생을 엉뚱한 방향으로 자꾸만 밀어냈다.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게 하고, 외면하고 회피하도록 말이다.

중국 당나라 때, 배휴(裵休)라는 불심 깊고 학식도 뛰어난 관리가 있었다. 그가 하루는 절에 찾아왔다. 마침 그 절에는 돌아가신 옛 고승들의 초상화를 모신 작은 법당이 있었다. 배휴는 법당을 안내하는 주지 스님에게 “영정은 여기 있는데, 고승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당황한 주지 스님은 뒷방에서 참선하는 스님을 불러와 배휴를 응대하게 했다. 그때 등장한 뒷방 스님이 바로 황벽 선사다.

선사가 오자 배휴가 다시 물었다. “스님, 영정은 여기 있는데, 이 고승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황벽 선사가 호령하듯 말했다. “배휴여! 그러는 당신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이에 배휴는 대답하지 못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의 힘은 결국 근원적인 질문을 할 줄 아는 힘이며, 근원적인 것을 꿰뚫어 핵심을 파악하는 안목이다. 배휴가 자기 깐에는 근원적인 질문을 한다고 했으나, 황벽 선사는 배휴가 서 있는 자리를 외려 꿰뚫어 되물었다. 그렇게 묻는 당신은 지금 어디 머물러 있느냐고.

사람들은 삶의 문제를 객관화하여 이야기하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에서 자기 자신은 쏙 빠져버리고 객관적인 척 남 이야기만 한다.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젊을 때는 당연히 사람은 죽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장년이 되면 주위의 친지들이 죽는 것을 보며, 부모도 친구도 이런저런 사유로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다 점차 자기의 죽음에 대해 인식하면서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자기 죽음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한다.

그건 그렇고, 요즘엔 인공지능 얘기가 부쩍 많이 들린다. 뭣 모르는 내게는 AI가 주는 편리함보다 미래에 대한 공포감이 더 크다. 왠지 보이지 않은 거대한 시스템, 그 힘에 의해 나도 모르게 피동적으로 주어진 삶을 따라갈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주는 공포감이다. 무력감과 소외감마저 느끼며 나는 생각한다. 나를 추동하는 힘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나 자신인가? 아니면 외부의 보이지 않는 힘인가? 나는 주체적인 삶을 살 것인가? 노예처럼 살아갈 것인가?

이제 우리 다시 한번 차분히 살펴보자.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상황에서 대처하는 나의 행동양식은 과연 어떠해야 하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선 자리를 명확하게 인식하면서 자기답게 살아가는 일이다. “일 년 중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은 단 이틀뿐이다. 하루는 ‘어제’이고 또 다른 하루는 ‘내일’이다. ‘오늘’이야말로 사랑하고 믿고 행동하고 살아가기에 최적의 날이다.” 달라이라마 존자의 말씀처럼, 그저 오늘을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