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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은희의 미래를 묻다

더욱 똑똑해진 유전자 가위, 새로운 생명도 빚어낼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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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1986년, 일본 오사카 대학의 한 대학원생이 대장균의 유전체 염기서열을 분석하여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연구 주제와는 상관없지만, 실험 과정에서 발견한 새로운 사실을 논문 말미에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적어두었다. ‘특정 DNA 구간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5번 반복되는 것을 찾아냈다.’ 그는 자신의 이 발견이 2020년 노벨화학상 수상자들의 연구 주제가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이후로 그는 이 ‘평범하지 않은’ 염기서열을 더 이상 연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DNA 손상 없이 편집·복제 가능
다윈의 ‘자연선택’ 법칙 넘어서
이전에 없던 결과물 만들 수도
미래에 대한 신중한 고민 필요

일본 대학생이 찾은 반복 염기서열

2020년 10월 스웨덴 왕립 과학아카데미가 3세대 유전자가위를 연구한 에마뉘엘 샤르팡티에(스크린 왼쪽) 막스 플랑크연구소 교수와 제니퍼 다우드나 UC버클리 교수를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발표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2020년 10월 스웨덴 왕립 과학아카데미가 3세대 유전자가위를 연구한 에마뉘엘 샤르팡티에(스크린 왼쪽) 막스 플랑크연구소 교수와 제니퍼 다우드나 UC버클리 교수를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발표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가 발견했던 의미를 알 수 없는 반복 서열은 다른 이들의 눈에도 띄었다. 심지어 이 패턴은 매우 흔한 것이었다. 다른 세균과 고세균의 유전체 안에도 이런 염기서열이 발견된 것이다. 특정 염기서열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여러 번 반복되는 패턴 말이다. 그리고 이 염기서열은 ‘기러기’나 ‘토마토’처럼 회문(回文) 구조를 이루고 있음도 알려졌다.

연구자들은 이 구조에 아주 정직한 이름을 붙여주었다. ‘규칙적으로 간격을 두어 분포하는 짧은 회문 반복 서열(Clustered regularly interspaced short palindromic repeats)’이라는 긴 이름을 말이다. 크리스퍼(CRISPR)가 공식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발효’(醱酵)란 미생물이나 균류 등을 이용해 인간에게 유용한 물질을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먹거리 중에는 된장과 김치·요구르트·맥주에 이르기까지 미생물의 발효 작용에 기대는 것들이 꽤 많다. 그래서 발효식품 산업에서 미생물은 제품 생산의 주요 부분을 담당하는 유능한 직원이며, 그만큼 귀하신 몸으로 대접받는다.

세계적 요구르트 제조업체 다니스코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니스코의 직원들은 유산균을 공격하는 박테리오파지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미생물을 숙주로 삼는 바이러스의 일종인 박테리오파지는 유산균의 떼죽음을 가져와 요구르트 생산에 막대한 차질을 빚기 때문이다. 그런 직원들에 눈에 박테리오파지의 공격에도 끄떡없는 유산균들이 들어왔다. 무엇이 이들에게 강한 내구성을 갖게 하였을까.

요구르트 지켜낸 크리스퍼-카스9

답은 크리스퍼와 DNA 절단 효소인 ‘cas9’(카스9)이 쥐고 있었다. 튼튼한 유산균의 크리스퍼에는 박테리오파지의 DNA의 일부가 들어 있었고, 카스9은 이를 인식해 이와 동일한 DNA가 감지되면 즉시 달려가 조각조각 잘라버렸다. 바이러스가 숙주를 공격하는 흉악한 살인마라면, 크리스퍼는 그 살인마의 몽타주, 카스9은 용맹한 경찰견이라 할 수 있다. 몽타주를 통해 충분히 살인마를 익혀둔 경찰견은 이와 일치하는 대상이 나타나면 가차 없이 덤벼들어 제압할 수 있다.

크리스퍼-카스9 시스템이 알려지면서 단순할 것만 같았던 박테리아도 고도로 정밀화된 면역체계를 갖추고 있음이 새삼 밝혀졌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크리스퍼 시스템을 연구하던 과학자들은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크리스퍼 시스템은 거의 자동으로 반응한다. 크리스퍼 회문 구조 사이에 들어있기만 한다면, 카스9은 불문곡직하고 이를 잘라 버리는 것이다. 이런 크리스퍼 시스템의 특징은 유전학자들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유용한 멀티툴이 되어 주었다.

유전자 재조합 넘어 편집까지

모든 생물의 유전 정보는 DNA다. 즉, 지구상의 생명체라면 모두 DNA라는 문자로 유전 정보를 저장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가 단 한 가지뿐이라면 전 세계 어디서든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는 것처럼, 생명체의 유전 정보가 모두 DNA로 이루어졌다면 생물종에 상관없이 유전자를 자르고 이어붙이고 편집하는 일이 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전제가 필요하다. 수십억 쌍에 이르는 염기서열 중에서 원하는 특정 부위만 정확히 인식하고 실수 없이 자르는 효율적인 유전자 가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제한효소·탈렌·징크핑거 등 다양한 유전자 가위는 존재했다. 그런데 이들은 종류에 따라 자를 수 있는 DNA 염기서열이 정해져 있다. 사용 범위가 한정적인 데다가, 원치 않는 부위까지 잘라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아서 유전자를 편집하는 세밀한 작업에 사용하기에는 다소 무딘 도구였다.

반면 크리스퍼 시스템은 자르기를 원하는 부위의 DNA 염기서열을 복제해 크리스퍼 부위에 결합하기만 하면 되니 인식 부위의 제한이 없는 데다가, 절단 부위에서 체크해야 하는 염기의 수가 21개나 되므로 실수로 다른 부위를 자를 가능성도 거의 없다. 크리스퍼-카스9 시스템을 이용하면, 기존의 유전자 재조합(gene modification)을 넘어 자유로운 유전자 편집(gene editing)이 가능해진다. 오랫동안 이어진 미생물과 바이러스 간의 생존 투쟁을 통해 ‘자연선택’된 결과물이, 유전자 편집을 통한 새로운 특성을 가진 생물의 탄생이라는 ‘인위 선택’의 훌륭한 도구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전문가 영역에서 일반인 영역으로

넷플릭스 드라마 ‘부자연의 선택(Unnatural selection)’은 크리스퍼 시스템이 가져온 현재의 변화를 직접 보여준다. 기존의 유전자 가위가 전문 무사들만이 휘두를 수 있는 비싸고 무거운 도끼였다면, 크리스퍼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값싼 문구용 커터에 가깝다. 크기가 작다고 절삭력이 떨어지지도 않으며, 오히려 DNA를 자르는 세밀한 작업은 커다란 도끼보다 작은 커터칼이 더 유용하다.

크리스퍼는 유전자 편집의 가능성을 전문가의 영역에서 일반인의 영역으로 한 발짝 옮겨준 것이다. 그 발걸음이 우리에게 어떤 빛깔의 미래로 인도할지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