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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이란 수감자 맞교환 합의에…"韓 동결자금 8조원, 스위스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달 20일(현지시간) 워싱턴DC의 조지타운 인근 외벽에 이란에서 구금 중인 시아마크 나마지, 베네수엘라에 붙잡혀있는 조시 앤젤 페레이라의 사진이 걸려 있다. 이란 정부는 최근 시아마크를 비롯한 5명을 교도소에서 가택연금으로 전환했다. AP=연합뉴스

지난달 20일(현지시간) 워싱턴DC의 조지타운 인근 외벽에 이란에서 구금 중인 시아마크 나마지, 베네수엘라에 붙잡혀있는 조시 앤젤 페레이라의 사진이 걸려 있다. 이란 정부는 최근 시아마크를 비롯한 5명을 교도소에서 가택연금으로 전환했다. AP=연합뉴스

미국과 이란이 양국 수감자들을 석방하고 한국에 동결된 이란의 자금 약 60억 달러(약 8조원)를 해제하는 데 합의했다고 10일(현지시간) 미 뉴욕타임스(NYT)와 이란 관영 IRNA·메르통신 등이 보도했다.

매체에 따르면 이란은 수도 테헤란의 에빈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미국 시민 5명을 가택 연금으로 전환하고, 이들을 임시 거처로 옮겼다. 대상자는 간첩 혐의 등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은 시아마크 나마지를 비롯해 사업가 에마드 샤르키, 환경 운동가 무라드 타바즈 등 이란계 미국인 3명과 익명을 요구한 2명이다.

양국 정부도 각각 성명과 기자회견 등을 통해 이를 공식 확인했다. 양측 설명을 보면 미국은 ‘수감자 석방’에, 이란은 ‘동결 자금 해제’에 방점을 뒀다. 에이드리언 왓슨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실(NSC) 대변인은 이날 성명에서 “이란으로부터 미국인 5명을 석방하고 이들을 가택 연금 했다는 확인을 받았다”며 “미국 시민들은 애당초 구금돼선 안 됐다”고 밝혔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도 기자회견에서 “긍정적 단계”라고 확인하면서 “그들의 귀국이 위태롭지 않도록 세부 사항은 공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이란에 대한 제재는 해제되지 않는다”며 “이번에 송금되는 이란의 자금은 인도주의적 목적에 따라 제한된 계좌로 이체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란 외교부는 10일 밤늦게 성명을 내고 “미국이 수년간 한국에서 불법적으로 압류한 이란 자산에 대해 수십억 달러를 빼내는 과정이 시작됐다”며 “미국이 의무를 준수하기 위해 필요한 보장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의 잔인한 제재로 이란의 금융 자원은 불법적으로 봉쇄됐다. 해제된 자산의 사용은 이란의 처분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또 미국의 이란 제재를 우회했다는 이유로 미국에 수감 중인 이란인들도 곧 석방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원화 동결자금, 스위스로…이란 “韓압박 통했다”

이에 따라 2018년 당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 강화된 대이란 제재로 한국의 시중은행에 묶여 있던 이란의 자금도 수년 만에 해제될 전망이다. 한국 시중은행의 원화 계좌에는 이란의 원유 수출대금 수조 원이 쌓여 있는데, 한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라”는 이란과 “제재를 준수하라”는 미국 양쪽에서 압박을 받아 왔다. 이와 관련 IRNA는 “이달 초 이란이 한국을 국제 중재 재판소에 제소할 계획을 밝히는 등 한국에 대한 압박이 미국을 움직이는 데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정통한 소식통은 이란의 메르통신에 “한국의 자금이 카타르의 계좌로 최종 이전된 이후에야 미국의 수감자들이 석방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이란 관계자는 IRNA에 “한국 내 자금은 스위스 은행에서 유로로 환전을 거쳐 카타르로 넘어갈 것”이며 “한국에서 스위스로의 송금이 승인됐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한국 외에도 이라크에 묶인 자금까지 총 100억 달러 이상이 이번 해제 대상”이라고도 주장했다.

NYT에 따르면 양국의 ‘미 수감자 석방, 동결 자금 해제’라는 합의는 올해 초 오만의 중재로 이뤄진 비공개 회담에서 이미 윤곽이 잡혀있었다. 이 같은 언론 보도를 미 정부는 부인해왔으나, 이번 발표로 공식화됐다. 오만 합의에는 이란이 시리아·이라크 등 중동의 미군 주둔지에서 이란이 지원하는 무장 단체의 공격을 자제하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고 한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 EPA=연합뉴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 EPA=연합뉴스

핵협상도 복원될 듯, 공화 “60억달러짜리 몸값”

워싱턴 근동정책연구소의 헨리 롬 선임연구원은 NYT에 “이번 거래는 올해 말 공식적으로 이란 핵 합의(JCPOA) 협상 복귀를 희망하는 미국과 이란이 긴장을 낮추기 위한 핵심 단계”라고 평가했다. 앞서 미국과 이란, 유럽은 2015년 이란의 핵농축을 제한하는 JCPOA에 합의했으나, 트럼프 정부가 2018년 이를 파기하고 대규모 제재를 복원했다. 이에 바이든 대통령은 JCPOA를 되살리기 위해 2021년부터 이란과 협상을 시도해왔으나, 지난해 6월 결렬된 이후 답보 상태다.

변수는 내년 미국 대선이다. 이란은 JCPOA를 파기했던 트럼프 대통령이 재차 당선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으며, 정권 교체에 따른 리스크를 미국이 보장하라는 입장이라고 한다. NYT는 “협상이 장기화 되면 되면 바이든 대통령도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새로운 합의를 이끌어 내기기 어려워진다”고 지적했다.

미 공화당은 바이든 정부의 이번 수감자 교환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톰 코튼 상원의원(공화·아칸소)은 성명을 내고 “바이든 대통령이 미국인 포로의 몸값으로 60억 달러를 지불한 것”이라며 “이 비겁한 회유 행위는 이란 지도자들이 더 많은 인질을 잡도록 부추길 뿐이다. 바이든은 이란의 장단에 춤추는 걸 멈춰야 한다”고 했다.

한·이란 관계 걸림돌 사라지나 

동결자금 문제는 그간 한·이란 관계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이란은 동결 자금 문제로 쌓인 불만을 각종 방식으로 드러내왔다. 2021년 이란 혁명수비대가 호르무즈 해협에서 한국 선박을 억류했다 95일만에 풀어줬는데, 대외적 이유는 환경 오염이었지만 사실상 동결 자금에 대한 시위 성격이었다. 지난 1월 윤석열 대통령이 “아랍에미리트(UAE)의 적은 이란”이라고 말해 논란이 벌어졌을 때도 이란은 한국대사를 초치하며 당시 사안과 무관한 동결 자금 문제를 언급했다.

정부는 그간 60억 달러에 달하는 동결 자금을 조금이라도 소진하기 위해 이란의 밀려있는 유엔 분담금을 대신 납부해주거나 제재에 걸리지 않는 인도적 차원의 물품을 지원해왔다. 다만 이런 방법으로 소진할 수 있는 동결 자금 규모는 워낙 작다는 한계가 있었다. 그 사이 이란은 동결 자금을 볼모로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양국 간 협의 사항을 왜곡해 자국 언론에 보도하는 ‘언론 플레이’를 하기도 했다. 아무런 근거 없이 “동결 자산을 돌려받기로 했다”고 주장하거나 “한국이 미국의 명령을 받고 이란이 음식과 약을 살 돈을 빼앗았다”고 비방하는 식이었다.

동결 자금 문제가 해소되고 더 나아가 미국과 이란 간 ‘빅 딜’로 핵합의가 복원돼 대이란 제재까지 해제된다면 이란이 다시 한국에게 '기회의 땅'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란 기대가 나온다. 2010년대에 이란에선 삼성과 LG가 가전 시장의 70%를 점유할 정도로 한국산 제품에 대한 인기가 높았다.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15년 7월 JCPOA가 타결되자 한국 기업의 이란 진출이 더욱 활발해졌고, 2016년 6월에는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이란을 방문해 경제 협력을 논하며 '세일즈 외교'를 펼쳤다.

다만 트럼프 행정부 시절인 2018년 5월 미국이 JCPOA에서 탈퇴하면서 대이란 제재가 복원됐고, 이란의 석유 판매 대금도 국내 은행 계좌에 묶여버렸다. 2021년 바이든 행정부 출범 후에도 핵합의 복원 협상이 있었지만 핵심 쟁점에서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타결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한편 외교부 당국자는 11일 기자들과 만나 미국과 이란 간 협상 상황에 대해선 말을 아낀 채 "정부는 동결자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이란 등 유관국과 긴밀히 협의해왔다"며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길 바란다"는 원론적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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