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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성탁의 시선

‘국가 동원령’이란 이름의 꼰대 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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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성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성탁 논설위원

김성탁 논설위원

한 코미디 프로그램에 ‘MZ 오피스’ 시리즈가 있다. 요즘 직장 모습을 과장해 보여주는데, ‘맑눈광’이 등장한다. ‘맑은 눈의 광인’을 줄인 말이다. 배우 김아영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해맑은 표정을 짓는다. 선배 사원이 “업무 중엔 에어팟 빼요”라고 주문하자 “저는 노래 들으며 일해야 능률이 올라간다”고 답한다. 당황한 선배가 “그럼 한쪽만 빼요”라고 하지만, 맑눈광은 뺐던 이어폰을 다시 꽂고 고개를 돌린다.

8일 오후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 참가 대원들을 태운 버스들이 전북 부안군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 부지를 떠나고 있다. 뉴스1

8일 오후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 참가 대원들을 태운 버스들이 전북 부안군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 부지를 떠나고 있다. 뉴스1

 위계질서가 강했던 직장 문화에 익숙한 세대라면 의아하겠지만, 젊은 세대에선 할 일만 제대로 하면 되지 뭐가 문제가 되느냐는 반응이다. 한곳에 모여 일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의사소통도 메일이나 메신저로 자주 하니 이어폰 착용을 대수롭지 않다고 여길 수 있겠다.

 최근엔 코미디가 아니라 실제 상황에서 논란이 뜨겁다. 부실 운영으로 비판받는 새만금 잼버리와 관련해서다. 폭염 대비 부족은 물론이고 더러운 화장실과 세면장, 부실한 식사에 의료 부족과 벌레까지 갖은 문제가 터졌다. 태풍 때문에 스카우트 전원이 철수했는데 그 과정에서 공무원과 공기업 직원 등에 동원령이 내려졌다는 불만이 잇따랐다.

 세계적으로 나라 망신을 당한 마당이니 정부는 국가 차원의 대책 마련이 급했을 것이다. 급한 불은 꺼야 한다는 여론이 없지 않고 대학이나 기업, 교회까지 숙박시설을 제공하고 나섰다. 어린 학생들이 큰 비용을 들여 왔는데 이대로 돌아가게 하는 건 도리가 아닌 것도 맞다. 그럼에도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에 날 선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잼버리 차출 공무원·민간인 반발
"X 싸는 사람, 치우는 사람 따로?"
기업들에 기대는 관례 언제까지…

 ‘태풍 같은 재난에 동원되는 건 당연히 나라에 헌신한다는 자세로 하는데, 타 지역 행사 망가졌다고 기숙사 파견 가서 사감 역할 하라는 게 맞나.’ ‘구청에서 학교당 어머니회 15명씩 지원해달라는데 그것도 휴가철에….’ ‘전쟁 나서 징발하는 것도 아니고 공기업 직원까지 왜?’ ‘잼버리 소방서 만든다고 구급차를 동원해버려 심정지 환자를 시군구 경계까지 넘어 출동하는 어이없는 상황’ 등이다. 화장실 청소에 지역 공무원들을 투입했다가 ‘강제 동원’ 시비가 일자 구인 사이트에 하루 20만원 알바 모집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비자발적으로 지원에 참여하게 된 이들이 분통을 터뜨리는 이유는 명확하다. ‘똥 싸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느냐’는 반응이 대표적이다. 잼버리 대회는 6년이나 준비 기간이 있었고, 예산만 1200억원에 달했다. 새만금이 후보지로 정해진 2015년 이후 관계 기관 공무원들이 다녀온 해외 출장만 99회다. 4만 명 정도가 참여하는 행사를 이 지경으로 만든 당사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실이나 국민의힘 관계자가 “기업, 지자체, 민간단체, 종교단체까지 금 모으기 운동처럼 나서 힘을 모았다”고 말한 것은 한참 잘못 짚었다. 주무장관으로서 “잼버리 사태가 한국의 위기 대응 역량을 보여줬다”고 한 김현숙 여가부 장관은 거론할 가치조차 없다. 반발하는 이들은 잼버리가 외환위기 같은 국가적 위기가 아니며, 세금을 들여 마땅히 임무를 완수했어야 할 공직자들의 무능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질타한다. 정부와 여당은 물론 개최지인 전북 도지사들이 속한 더불어민주당까지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K팝 콘서트를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달라진 세태가 도드라졌다. 아쉬움이 클 대원들을 위로하자는 취지였지만, 여당 인사의 BTS 참여 주장이 불을 댕겼다. 팬클럽이 입장문을 내고 “정부의 강압적인 요구에 따라 콘서트에 참여하는 것은 민주주의 퇴행이자 ‘공권력 갑질’”이라고 반발했다. 전시도 아닌데 국가가 필요시 요구하면 호응할 거라는 기대는 접을 때가 된 것이다.

 MZ 오피스 코너에서 맑눈광은 새로 입사한 후배에게 시쳇말로 ‘역관광’(역공)을 당한다. 이어폰이 아니라 커다란 무선 헤드폰을 끼고 일하는 후배는 “PPT 자료 좀 달라”는 요청에 “어제 오후에 시키신 일이라 상식적으로 지금 완성하기 힘듭니다. 애초에 마감 기한을 말씀해주지 않으셨습니다만…”이라고 대꾸한다. 후배 사원의 이름은 기가 엄청 세다는 뜻의 ‘기존쎄’다.

 이제 정부·지자체 등 공적 조직은 공무원은 물론이고 민간 부문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잼버리 위기 극복에 기업의 후원이 도움을 줬지만, 문제만 터지면 기업에 물품이나 시설, 인력을 지원받는 것도 그만할 필요가 있다. 맑눈광에 이어 기존쎄 세대는 고유 업무와 관련 없는 동원에 조직적 반발을 넘어 소송으로 대응할지 모른다. 꼬박꼬박 세금 내는데 공직자가 제대로 일하지 못했으면 그 자리를 내려놓으라고 요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