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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현호의 법과 삶

민법에 의료계약 조항 신설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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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신현호 변호사·법학박사

신현호 변호사·법학박사

인류가 근대에 들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풍요롭게 살 수 있게 된 큰 이유 중 하나는 계약자유의 원칙이 확립되면서다. 거래를 누구와 어떤 내용으로 할지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게 되면서 시장경제가 활성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가 다원화·복잡화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매매·임대차 같이 간단한 거래에서 벗어나 시장질서를 좌지우지하는 독과점기업이 등장하고 자유롭게 계약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이에 선진국에선 계약당사자가 대등한 입장에서 계약하고, 향후 분쟁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전형계약을 만들어 나갔다. 일례로 임대차계약규정은 임차인의 임차권보호, 고용계약규정은 피용자의 근로권보호, 소비대차계약규정은 이자율 제한 등을 담았다.

연 15억회 이상 의료계약 체결
독일은 2013년 입법 절차 마쳐
환자에 정확한 정보 제공해야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우리나라에서 단일계약으로 가장 많이 체결되는 것이 진료계약임에도 진료계약규정이 민법에 없다. 5200만 국민 대부분이 연간 건강보험진료계약 약 13억건, 의료급여진료계약 약 8000만건, 교통사고진료계약 약 2000만건을 비롯하여 산업재해진료계약, 보훈병원 진료계약, 장기요양급여계약, 미용성형수술진료계약 등 총 15억건 안팎의 진료계약이 체결되고 있다.

진료행위는 하나뿐인 생명을 다루는 응급성이 있고, 한번 손상되면 원상회복이 불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다. 인체의 다양성과 예측 불가능성으로 진료 내용을 미리 정할 수 없고, 그 자체가 전문 분야이어서 진료비를 자유롭게 협상하기 어려워 기존의 위임·도급·고용계약 등으로 규제할 수 없는 독특한 사회적 행위이다. 생명을 앞둔 환자는 어쩔 수 없이 진료를 받아야 할 때 의료인이 일방적으로 작성한 입원수술계약서를 하나씩 살피면서 계약 내용을 변경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환자는 하는 수 없이 서명하고, 진료비를 주면서도 의사에게 눈치를 보고 진료채권자로서의 환자권리를 제대로 주장조차 못 하는 경우가 흔하다.

자동차를 살 때는 자동차 세일즈맨에게 상세하게 묻고 가격을 협상할 수 있다. 그러나 수술할 때는 전혀 다르다. 환자는 수술 전 치료방법, 치료재료, 치료시기, 사망 위험성 등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요구하고 하나씩 스스로 결정하기 어렵다. 수술 중 병원감염, 식물인간이 되어도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환자가 모두 입증하여야 한다.

수술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진료정보는 의료인이 작성한 기록으로 재판해야 된다. 그 정보가 정확하게 작성된 것인지 혹은 위조된 것인지를 알 수 없는 채로 말이다. 그 밖에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는 군병원, 교도소 의무실에서 치료받는 군인, 재소자의 권리는 인권 사각지대에 있다. 환자의 치료권을 보호하기 위해 진료계약규정 신설이 시급한 이유이다.

독일은 이미 2013년 100여년 간 축적된 판례를 정리하여 민법에 진료계약규정을 신설하여 환자의 권리를 두텁게 보호하고 있다. 독일 진료계약법은 의사는 환자에게 진단, 치료, 부작용 정보는 물론 진료비용에 관해서 서면으로 설명하도록 하였다. 의료인은 진료 전에 치료 동의를 받아야 하고, 다른 치료방법에 관해서도 설명하여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수술실·진료실 등 의료인이 관리하는 영역에서 발생한 중대 사고에 대해서는 과실을 추정하고 있다.

지난 6월 법무부는 제3기 민법개정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과거 2009년 제2기 민법개정위원회에서 진료계약이 논의되었으나 입법에 실패하였다. 제3기 위원회에서 진료계약이 진지하게 논의되고 환자보호를 중심으로 한 입법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진료계약규정이 없다 보니 우리 법원은 의료행위에 대한 해석을 다양하게 하고 있다. 의료인에게 엄격한 책임을 묻기도 하고, 때로는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재량을 허용하는 해석을 하여 환자나 의료인 모두에게 예측을 어렵게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입증책임이다. 법원은 “일반인의 상식에 바탕을 둔 사고일 경우 의료과실을 추정한다”고 판단하기도 하고, 반면 “단지 중대한 악결과가 발생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의료과실을 추정할 수 없다”는 반대의 해석을 하여 당사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진료계약규정이 제정되면 환자·의료인·법원 모두 진료행위 평가에 대한 예측이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신설되는 진료계약에는 환자가 주도적으로 치료받을 권리가 보장되고, 진료정보는 환자가 공유할 수 있으며, 사망 등 중대한 사고 발생한 경우 의료인이 잘못이 없다는 점을 입증하지 못하면 과실을 추정하여야 하도록 입법화할 필요가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정치에 무관심하면 가장 저급한 인간의 지배를 받는다”고 하였다. 모든 국민이 진료계약규정이 제정되도록 관심을 갖고 참여하여야 유권자의 눈치를 보는 국회와 정부가 움직인다. 환자의 권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해야 누릴 수 있다.

신현호 변호사·법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