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상렬의 세계경제전망

기업·정부의 일자리 합작, 미국 경기침체 막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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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상렬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소프트랜딩하는 미국 경제

이상렬 논설위원

이상렬 논설위원

“경제적 허리케인에 대비하는 게 좋겠다.”(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 2022년 6월)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길고 고통스러운 경기 침체에 빠질 것이다.”(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 2022년 9월)

‘월가의 황제’(다이먼 회장)도 틀렸고, ‘닥터 둠’(Dr. Doom·루비니 교수)도 틀렸다.

22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금리를 올린 미국 경제가 경기 침체 없이 물가를 잡아가며 연착륙(소프트랜딩)해 나가고 있다.

인플레 잡으려 금리 인상 공세
“고통의 시간 올 것” 예상 뒤집고
성장·고용 모두 안정적 단계로

기업 해고 자제, 일자리는 증가
금융위기 이래 부채비율 줄어
탄탄한 소비가 실물 경기 받쳐

30여년 만에 가장 공격적인 금리 인상

미국은 코로나19 사태가 끝나고 물가가 치솟기 시작하자 금리 인상에 나섰다. 글로벌 공급망이 와해하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에너지와 식품 가격까지 급등하던 시기였다. 금리 인상은 30여년 만에 가장 공격적인 속도로 진행됐다. 현재 미국의 기준금리는 연 5.25~5.5%. 지난해 1월(0~0.25%)보다 5.25%포인트 높아졌다.

월가는 미 연방준비제도(Fed)의 급격한 금리 인상 때문에 경기침체가 올 것이라고 아우성쳤다.

경제학자들도 경기침체는 피하기 어렵다고 봤다. 지난해 10월 월스트리트저널(WSJ) 설문조사에서 경제 전문가들은 향후 1년 이내 미국 경제가 침체에 빠질 확률을 63%로 예상했다.

물가 3%, 실업률 3.5%, 성장률 2.4%

김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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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재 미국 경제는 이런 우려를 일축하는 모습이다. 6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0%에 그쳤다. 작년 6월(9.1%)의 3분의 1로 떨어진 것이다. Fed가 중시하는 근원 개인소비지출(PEC) 물가지수도 6월에 4.1% 상승에 머물렀다. 2021년 9월(3.7%) 이후 최저치다.

금리를 올리면 물가야 잡히지만 경기가 가라앉고 고용시장이 냉각된다는 것이 경제학의 통념이다. 이른바 ‘경착륙’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고금리와 고물가에 가계는 소비를 줄이고 기업은 임금 억제와 정리해고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소비 둔화→경기 침체→고용 악화의 악순환이 전개된다.

그러나 현재 미국 고용 시장은 탄탄하다. 7월 실업률은 3.5%로 사상 최저 수준이다. 고용시장의 주력인 25~54세 경제활동참가율은 83.4%로 코로나 이전 수준을 넘어섰다. 시간당 평균 임금은 전년보다 4.4% 올라 물가상승률을 능가했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미국 경제 전체 성적도 예상을 뛰어넘는다. 2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속보치)은 연율 2.4%로 집계됐다. 1분기 2.0%(확정치)보다 높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지난달 25일 올해 미국 경제 성장 전망치를 1.8%로 4월보다 0.2%포인트 높였다. 주요 7개국(G7) 중에서 최고다.

각종 경제지표는 미국이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에서 경기 침체에 빠지지 않고 승기를 잡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롬 파월 Fed 의장은 지난달 기자회견에서 “Fed는 더는 경기 침체를 예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2007~2009년 금융위기와 대조적

도대체 경제학의 통념을 깨는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는 미국 경제의 강한 회복력(resilience)이 비결이었다고 분석한다. 특히 노동시장과 소비, 주택시장, 금융시스템 등 4가지에서 회복력이 발휘됐다는 것이다. 그 중심에 탄탄한 고용이 있었다. 급격한 금리 인상과 비용 상승에도 산업 현장에선 정리해고 자제 움직임이 생겨났다. 고용 시장의 열기가 빠지면서 고용 증가 속도가 둔화했을 뿐이다. 2007~2009년 금융위기와 대조적인 현상이다.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제 사람들은 해고가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해고자들을 대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안다”고 전했다. 대량 해고를 피한 대표적 기업이 애플이다. 팀 쿡 최고경영자(CEO)는 “정리해고는 맨 나중에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유연한 노동시장을 강조하는 미국에서 해고 신중론이 생긴 것은 이례적인 구인난 때문이다. 여기엔 몇 가지 사정이 있다.

우선 코로나 19 후유증이다. 미국 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코로나가 정점이었을 때 사업체 12만 개가 문을 닫았고, 3000만 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었다. 그중 상당수는 일터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코로나 당시 조기 퇴직자만 300만 명 이상이었다. 직전 정부인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억제 정책도 한몫했다. 오바마 대통령 시절인 2015~2016년 104만9000명이었던 순이민 인구는 2020~2021년 24만7000명으로 줄었다. 이는 노동력 공급 감소로 이어졌다. 반면 구인 수요는 넘쳐났다. 바이든 행정부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지원법이 정부와 기업 투자를 촉발하면서 일자리를 대거 만들어냈다. 창업 열기도 식지 않았다. 미 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지난 2년간 신규사업 신청 건수가 약 1000만 건에 달했다.

일자리 안정되자 지갑도 열어

고용은 소비 회복의 일등 공신이다. 해고가 줄고 일자리가 유지되면서 가계의 소비 여력이 튼튼해졌다. 다른 이유도 있다. 코로나 때 풀린 실업수당과 복지급여, 주가 상승 수익이 소비자들 지갑에 남아있었다. 코로나 기간 중 미국인의 저축이 약 3조7000억 달러 증가했다는 연구(옥스퍼드 이코노믹스)도 있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미국 가계가 미리 부채를 줄여놓은 것도 효과를 발휘했다.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금융위기로 치닫던 2007년 4분기 100.5%까지 오른 뒤 꾸준히 낮아졌다. 코로나 기간 80%를 넘었지만 다시 하락해 올해 1분기 73%를 기록했다. 가계부채 급증으로 소비 여력이 없어 내수가 위축되는 다른 나라와는 사뭇 달랐다.

2분기 미국 소비는 1.6% 증가했다. GDP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소비가 건실하게 버틴 것이 미국 경제의 연착륙을 뒷받침한 것이다.

주택시장이 무너지지 않은 것도 실물 경기 지탱에 주효했다. 장기 고정금리 주택담보대출(모기지)역할이 컸다. 미국 모기지의 70% 이상이 30년 고정금리 상품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대출이 금리 본격 인상 전에 이뤄졌다. 금리 인상과 함께 모기지 이자율이 오르자 저금리로 모기지를 빌린 이들이 주택 교체 계획을 접었다. 주택 공급이 부족해졌고 주택 시장은 추락을 피했다. 고정금리 모기지는 금리 인상의 후폭풍에서 가계를 보호하는 방패막이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저금리 장기 모기지, 주택시장 견인

금융시스템의 빠른 회복도 빼놓을 수 없다. 지난 3월 미국 내 자산 기준 16위인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했다. 미 역사상 2번째 규모의 은행 파산이었다. 자칫 대규모 예금인출사태(뱅크런)로 번질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미 정부와 Fed는 예금 전액 보장, 퍼스트시티즌스 은행의 SVB 인수 등 발 빠른 대처로 시장의 공포심을 잠재웠다. HBR은 “리스크의 전염 위험은 과대평가된 반면 그걸 막으려는 정책당국의 역량은 과소평가됐다”고 진단했다.

미국의 소프트랜딩은 세계 경제에 굿 뉴스다. 세계 경제는 중국이란 성장 엔진이 식어버린 상태다. 올 초 기대를 모았던 중국의 리오프닝 효과는 미약하다.

“축배 들 때 아니다” 경계론도

그러나 아직 연착륙의 축배를 즐기기엔 이른 감이 있다. 고금리 여파가 시차를 두고 실물 경기를 짓누를 것이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NYT)는 1990년대 이래 금리 인상이 초래한 세 차례의 경기침체(1990년, 2000년, 20007년) 직전 시장엔 연착륙 기대감이 퍼져 있었다고 복기했다. 매번 낙관론이 제기된 지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아 실업률이 치솟고 경기는 곤두박질쳤다. 역사는 위기 뒤 소프트랜딩에 신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무섭게 금리를 올리면서 물가와 고용 안정이라는 모순된 두 가지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해나가는 Fed와 미국 정책당국의 역량은 높게 평가받을 만하다. 미국 경제의 연착륙 과정은 한국 경제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한국, 일자리 늘리고 부채 줄여야

우선 고용의 중요성이다. 일자리를 만들고 지켜야 경제를 돌릴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최근 한국 경제는 양질의 일자리 창출 역량이 많이 약해졌다. 기업 유치를 위한 바이든 정부의 파격적인 지원은 재정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한국은 여전히 기업 지원을 위한 감세나 규제 완화 정책을 맘껏 펼치기 어렵다. 산업 정책이 더는 반기업 프레임에 휘둘려선 안 된다.

부채 감축도 시급한 과제다. 한국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지난해 4분기 기준 105%다. 가처분소득(세금, 사회보장부담금 등을 제외한 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2021년)은 206.5%나 된다. 대출 잔액의 76.4%(2022년)는 변동금리 대출이어서 금리 인상 충격에 고스란히 노출돼있다. 이렇게 빚에 짓눌린 채로는 소비가 살아날 수 없고 경제가 일어나기 어렵다. SVB사태는 금융 시스템 위기를 막는 조기 진화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워준다. 일자리는 늘리고 부채는 줄이고 위기 대응은 빠르게…. 한국 경제가 가야 할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