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적지 않은 남녀가 부모가 될 생각이 전혀 없으면서도 피임기구조차 쓰지 않고 성관계를 한다. 이것이 임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기본적인 성 지식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어른이 된다. 대학 가기 위한 킬러 문항은 중요해도, 인생을 구할 수 있는 성교육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이 한국의 교육 풍토이다.
병원 출산하면 모두 출생신고 #위기임산부, 나홀로 출산 위험 #생부에게도 양육 책임 지워야
이러니 ‘계획 하지 않은 임신’으로 인생이 위기에 빠지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 결과가 사회에 큰 충격을 준 출생 미등록 아동 실태다. 보건복지부가 2015년에서 2022년까지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2123명의 아이를 찾는 과정에서 연일 쏟아지는 참담한 뉴스들을 보기가 두려울 정도이고 온 국민이 놀랐다는 반응이다. 우리는 이것을 정말 몰랐을까.
저출생으로 나라가 망할 것처럼 난리가 난지도 20여 년이 흘렀다. 출산율 올리겠다고 갖가지 정책으로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으면서도, 한편에선 ‘준비 안 된 임신’이라는 이유로 아기들이 죽임을 당하고 버려지는 것을 손 놓고 보고 있는 ‘준비 안 된 사회’가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그나마 오랜 논란 끝에 ‘출생통보제’가 지난 6월 말 국회 문턱을 넘었다. 1년 뒤부터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의료기관으로부터 산모와 아기에 대한 출생정보를 받아 시·읍·면장에게 통보하게 된다. 만일 출생 신고가 1개월 이내에 안 되면 시·읍·면장이 직권으로 출생 신고를 한다. 즉 산모의 자녀로 가족관계등록부에 오른다는 의미다. 그동안 부모 손에만 맡겨왔던 출생 신고를 드디어 국가가 책임지고 ‘태어난 즉시 출생 등록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다만 대상은 의료기관에서 태어난 아기로 한정된다.
그래서 내년 7월부터 아기 낳은 걸 주위에 알리고 싶지 않은 여성이 어떤 선택을 할지 상상만 해도 두렵다. 아마도 신분 노출을 피하려고 병원에 오지 않고 남몰래 혼자 출산하려 할 위험이 크다. 분만은 산후 출혈 등 예측하기 힘든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어 혼자 분만하는 것은 아기는 물론이고 산모에게도 위험천만한 일이다. 한마디로 출산을 숨기려다 여성과 아기의 목숨을 잃을 수 있다. 그래서 아기의 권리를 위한 출생통보제는 병·의원에서 익명 출산을 허용하는 ‘보호출산제’와 반드시 함께 시행되어야 한다.
그동안 죽어간 아기들을 생각하면 늦어도 너무 늦은 제도인데 우리는 지금도 갑론을박만 하고 있다. 보호출산제를 반대하는 의견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아기 유기를 조장하여 원 가정에서 양육될 권리를 박탈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아동이 친생부모를 알 권리를 침해한다는 것이다. 둘 다 타당한 우려다. 그러나 아무리 중요한 권리도 아기가 우선 살고 봐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보호출산제가 아동 유기를 조장하지 않으려면 과연 무엇이 필요할까. 정부는 전국의 22개 출산지원시설 중 11개소에 ‘1422-37 위기임신출산지원센터’를 설치했다. 24시간 긴급전화로 긴급상담 및 출동 체계를 갖추고 위기임신여성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상담과 의료, 경제, 양육, 주거생활, 교육 등 종합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위기임신출산지원센터 중 한 곳인 애란원에서 2019~2021년 맞춤형 밀착 지원을 한 위기임신여성 147명의 결과를 보면 미혼이 56%, 기혼이 40%, 사실혼이 4%였는데 대다수가 지원 제도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상담 시작 전에는 31%가 입양을 원했고 13%가 결정을 못 했는데 상담 후에는 입양이 15%로 줄었다. 지원을 충분히 하면 양육하는 어머니가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혼인 중 혼외 임신으로 아기의 출생을 남편에게 알리는 것이 부담되어 아이를 두고 사라진 경우가 2명 있었는데, 이는 보호출산제가 필요한 경우다.
이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은 아동 유기를 조장하는 것은 보호출산제가 아니라 상담과 종합 지원 부족이다. 불가피한 익명 출산을 보장하면서 여성이 국가의 지원 체계 안에서 안전하게 출산하고 아이와 본인의 미래에 대해 심사숙고하여 결정할 수 있도록 보호출산제를 만들면 더 많은 여성과 아기들을 살릴 수 있다.
두 번째 쟁점인 아동의 친생부모를 알 권리도 매우 중요하다. 누구든 자신의 친생부모를 알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다. 그러나 이는 어머니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익명으로 출산하고자 하는 여성들 문제는 지적하면서 아기의 아버지들에 대해 책임을 묻는 목소리는 거의 없다. 남성들은 자식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도 익명으로 잘 사는 사회에서 여성들만 숨어서 목숨 걸고 아기를 낳아야 하는가? 서구 선진국 중엔 아버지의 신원을 특정해서 친자 확인을 강제하고 국가가 양육비에 대한 구상권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다. 낙태와 영아 유기가 적은 나라들처럼 한국도 남성들에게 피임하지 않은 성관계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지게 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합의된 성관계로 인한 모든 임신에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도록 제도화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 후에 아이들의 권리가 친생부모의 삶과 함께 지켜지도록 해야 한다. 엄마가 살아야 양육이든 입양이든 이후의 삶을 숙고하여 결정할 수 있다. 여성들이 어떠한 상황에서 임신했어도 차별받지 않고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게 출산하도록 지원하는 보호출산제를 만들자. 한 명의 아기라도 더 빨리 살릴 수 있게 법과 제도를 시급히 정비해야 한다. 누구든 아기를 낳기만 하면 축복받는 사회를 우리도 만들어 보자.
최안나 국립중앙의료원 산부인과 난임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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