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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만 이용? 95%가 가짜…소프트뱅크·JP모건도 속인 유니콘 [팩플]

중앙일보

입력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가 비전펀드 2의 투자사인 소셜 앱 IRL 창업자를 사기 혐의로 고소하고, 사용자 수를 속여 받아간 투자금 2000억원도 회수하라는 소송을 냈다. 사진 로이터=연합뉴스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가 비전펀드 2의 투자사인 소셜 앱 IRL 창업자를 사기 혐의로 고소하고, 사용자 수를 속여 받아간 투자금 2000억원도 회수하라는 소송을 냈다. 사진 로이터=연합뉴스

이용자는 많고 돈은 못 버는 B2C 플랫폼, ‘긁지 않은 복권’이 아니라 ‘안 긁히는 복권’이었나.
소프트뱅크, JP 모건 같은 대형 투자자들이 사용자 수를 부풀려 수천억 원을 투자받은 ‘깡통 유니콘’을 고소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글로벌 불경기로 식어가는 스타트업 투자 열기에 얼음물을 끼얹은 격이다.

무슨 일이야 

소프트뱅크 그룹이 스타트업 IRL의 창업자 아브라함 샤피와 그 가족을 사기로 고소하고 1억5000만 달러(약 2000억원)의 투자금 반환을 청구했다고 4일(현지시간) 디인포메이션과 CNBC 등 외신들이 보도했다. 2017년 설립된 소셜 메시징 앱 IRL은 지난 2021년 소프트뱅크 비전펀드2 등으로부터 투자 받을 당시 기업가치 11억7000만 달러(약 1조5300억원)를 인정 받았다. 이는 IRL이 투자자에게 내민 ‘1200만 명의 월간 활성이용자(MAU)’, ‘30세 미만 미국인 10%가 이용’, ‘연 400% 성장률’ 같은 실적 수치에 근거했다.

사용자의 95%를 거짓으로 부풀린 것으로 드러난 소셜 앱 IRL은 지난 6월 서비스를 폐쇄했다. IRL 캡쳐

사용자의 95%를 거짓으로 부풀린 것으로 드러난 소셜 앱 IRL은 지난 6월 서비스를 폐쇄했다. IRL 캡쳐

그러나 지난해 IRL 직원의 내부 고발로 IRL의 이용자 수가 부풀려진 사실이 드러났다. 이사회가 창업자를 CEO에서 해임한 뒤 파악한 사실은 이용자의 95%가 봇(bot)과 자동화 계정 등으로 부풀려진 가짜였으며, 창업자와 그의 형제들이 수백만 달러를 들여 가짜 계정을 생성해왔다는 것. IRL 신규 이용자 획득에 드는 비용은 투자자에게 밝힌 것보다 3배나 많은 고비용 구조였다는 것도 미 금융 규제 당국의 조사로 드러났다. 그간 이용자 수가 외부 기관 측정치와 차이가 난다는 지적이 있을 때마다 창업자는 “우리 앱은 개인정보 보호 대상인 미성년 사용자가 많아서 외부에서 데이터 추적이 잘 안 된다”라며 둘러댔지만, 사실은 돈을 쏟아붓고 가짜 계정으로 채운 텅 빈 플랫폼이었다는 것. IRL은 지난 6월 서비스를 접었다.

이게 왜 중요해

현재 수익을 내지 못하는 스타트업이 많은 사용자 수를 내세워 거액의 투자를 받던 벤처투자 관행이 타격을 입었다. 플랫폼에 모인 사용자 수만으로도 기업가치를 인정받던 투자 업계의 분위기는 ‘사용자 부풀리기’ 사기의 배경으로 지적돼 왔다.

앞서 지난 4월에는 사용자 수를 부풀려 회사를 매각한 혐의로 미국 핀테크 플랫폼 ‘프랭크’의 창업자 찰리 제이비스가 재판에 넘겨졌다. 펜실베니아대 와튼 스쿨 출신의 제이비스는 2017년 27세의 나이로 대학생 학자금 대출 신청을 간소화해주는 사업을 벌여 525만 고객을 끌어 모았고, 2021년 JP모건은 1억7500만 달러(약 2330억)에 프랭크를 인수했다. 그러나 JP모건이 인수 후 확인해보니 프랭크의 실제 사용자는 30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 JP모건의 고소로 수사에 착수한 미 수사 당국은 제이비스가 데이터 과학 교수를 고용해 가짜 고객 데이터를 만들어낸 정황을 포착했다.

사기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미국 핀테크 기업 '프랭크' 창업자인 찰리 제이비스가 지난 6월 변호사와 함께 뉴욕 연방법원에 들어서고 있다. 사진 EPA=연합뉴스

사기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미국 핀테크 기업 '프랭크' 창업자인 찰리 제이비스가 지난 6월 변호사와 함께 뉴욕 연방법원에 들어서고 있다. 사진 EPA=연합뉴스

이게 무슨 의미야

수익 없이 사용자 수만 많은 B2C 플랫폼을 보는 투자자들의 눈이 달라졌다. 자고 일어나면 유니콘이 등장하던 이머징 마켓엔 이런 플랫폼들이 수두룩하다. 시장 조사 플랫폼 트랙슨에 따르면, 2021년부터 지금까지 인도에서 114개 유니콘 기업이 탄생했지만 이 중 17곳만 수익을 낸다.

지난 2월 인도 현지 매체에 따르면, 글로벌 투자사 세쿼이아캐피털은 ‘인도의 틱톡’이라 불리던 소셜 동영상·커머스 앱 트렐(Trell)에 투자했다가, 기존 투자금의 5분의 1도 안 되는 금액에 지분을 매각했다. 한때 유니콘을 넘보는 회사였으나 재정 비리 의혹이 불거진 데다 수익 내기도 요원해 보이자, 세쿼이아가 78%의 손해를 감수하고 철수했다는 것. 이외에도 인도 유니콘 중 고메카틱(모빌리티 서비스), 바라트페(핀테크) 등도 각종 수치를 부풀린 사실이 드러나 투자가 중단되고 소송에 휘말려 있다.

최근 오랜 적자 끝에 흑자 전환하는 B2C 플랫폼이 나오고 있지만, 비결은 요금을 대폭 인상한 데 있었다. 차량 호출 업체 우버는 창업 14년 만에 지난 2분기 첫 흑자를 달성했는데 비결은 주식 투자 성과와 요금 인상이었다. 우버 CEO는 지난 1일 외신 인터뷰에서 기자가 “뉴욕에서 우버로 2.95마일(4.75㎞) 이용료가 얼마일 것 같냐” 묻자 “20달러”라고 답했다가 “50달러 이상”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여 빈축을 샀다.

국내는 어떤가 

사용자 수를 늘리며 투자를 받았던 국내 B2C 플랫폼도 지난해 벤처 투자금이 경색되자 어려움을 겪고 있다. 75만 회원을 보유한 오늘회(오늘식탁)는 지난해 서비스를 중단한 뒤 일부 택배 서비스만 재개했고, 20만 이용자를 확보한 샐러드 신선배송 서비스 프레시코드는 지난달 파산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스타트업 투자사 관계자는 “활성 이용자 수가 여전히 중요한 수치인 것은 맞지만, 단기간에 마케팅으로 부풀릴 수 있어 이를 항상 주의해서 본다”라며 “빠르게 이용자를 모으고 사업을 키워가는 플랫폼의 장점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투자자들이 AI나 보유 기술에 좀 더 주목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간 너도나도 ‘플랫폼’, ‘수퍼 앱’을 외친 데 대한 반감도 작용했다고.

AI 시대에는 기업 스스로도‘사용자 수’를 성공의 지표로 보지 않는 분위기다. AI 기반 서비스는 클라우드·데이터센터 비용 등 구동 비용이 높기 때문. 하반기 AI 상용 서비스를 준비하는 네이버와 카카오도 지난 2분기 실적 발표에서 “적절한 과금 정책과 사업화 전략”(최수연 네이버 대표), “비용이 합리적인 적정 모델”(홍은택 카카오 대표) 등을 언급하며 운영 효율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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