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잼버리 ‘재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조현숙 기자 중앙일보 기자
조현숙 경제부 기자

조현숙 경제부 기자

영국 남부에 있는 조그만 섬인 브라운시(Brownsea). 우거진 숲에 붉은 다람쥐·공작·왜가리 같은 야생 동물이 어울려 사는 아름다운 섬이다. 영국 육군 중장이었던 로버트 베이든 파월은 1907년 브라운시섬으로 휴가를 떠났다. 어릴 적 형제들과 작은 배를 타고 건너가 모험을 하던 추억의 섬이었다.

파월은 보어전쟁(1899~1902년)의 영웅이었다. 참혹한 전쟁 한가운데서 살아 돌아온 생존자이기도 했다. 그가 경험한 전쟁의 위기는 나이와 신분, 성별을 가리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의 전조가 나타나기 시작하던 때, 그는 오랫동안 구상했던 일을 실행에 옮겼다. 브라운시섬은 그 ‘실험’을 하기에 제격이었다.

파월은 그해 8월 20명의 소년을 섬으로 불러모았다. 귀족에서 농민까지, 출신은 다양했다. 신분에 따라 교육·생활 환경이 크게 달랐던 당시 영국에선 혁신적인 선택이었다. 파월이 의도한 일이었다. 그가 할 훈련은 특권층이 아닌 모든 이를 위한 것이었다.

파월은 20명 소년과 함께 야영을 시작했다. 오두막 만들기, 낯선 곳에서 길 찾기, 동물과 식물 관찰, 화재 진압과 생존 수영, 구조 활동, 응급 처치까지. 다양한 생존 훈련이 9일간 이어졌다. 용기와 봉사, 시민의 의무에 대한 교육도 빠지지 않았다. 파월이 내세운 신조는 ‘준비하라(Be prepared)’였다.

파월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08년 『소년을 위한 스카우트 활동(Scouting for Boys)』이란 책을 써냈다. 출간과 동시에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5개 언어로 번역됐다. 1909년 영국을 시작으로 스카우트는 172개국 1억여 명 회원을 둔 조직으로 성장했다.

한국 새만금에서 ‘2023년 세계스카우트잼버리’가 열리고 있다. 153개국 4만여 청소년이 즐겨야 할 축제는 악몽이 됐다. 폭염과 벌레, 비위생적인 환경, 턱없이 부실한 음식에 환자가 속출했다.

영국과 미국, 싱가포르 대표단이 조기 철수에 나섰다. 정부도 태풍을 이유로 대피 겸 철수를 결정했지만 “꿈이 악몽으로 변했다”(로이터통신), “끔찍하다. 난장판이다”(가디언), “재난으로 낙인 찍혔다”(인디펜던트)는 각국 비판이 이미 나온 뒤다. ‘준비하라’는 스카우트 모토를 철저히 망각한 대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