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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골 서늘해 자꾸 돌아봐""이어폰도 못 껴"…칼부림 공포 확산

중앙일보

입력

묻지마 칼부림 포비아 확산

4일 오전 대전 대덕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한 남성이 40대 교사를 흉기로 찌르고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 경찰과 소방당국이 사건현장인 학교에 출동해 있다. 남성은 이날 본인을 졸업생으로 소개하고 교내로 들어온 뒤 범행을 저질렀다. 김성태 객원기자

4일 오전 대전 대덕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한 남성이 40대 교사를 흉기로 찌르고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 경찰과 소방당국이 사건현장인 학교에 출동해 있다. 남성은 이날 본인을 졸업생으로 소개하고 교내로 들어온 뒤 범행을 저질렀다. 김성태 객원기자

지금 국민은 거리에서 시도 때도 없이 뒤돌아보고 있다. 난데없이 방검복(防劍服)을 만든다는 업체 주가가 뜨기도 했다.

4일 서울 관악구의 직장에 출근하기 위해 강남역을 지나가던 김모(25)씨는 “뒷골이 서늘한 느낌이 들어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며 “언제라도, 어떻게 될지 몰라 이름은 밝히기 싫다”고 말했다. 이날 경기도 성남시 야탑역에서 만난 임모씨도 “초식동물처럼 두리번두리번 사주경계를 하면서 일터로 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름과 나이를 물어보는 기자에게 “처음 보는 사람은 이제 믿지 못하겠는데, 그런 걸 왜 물어보느냐”고 타박했다.

대한민국은 지금 포비아(phobia·공포증) 상태다. 지난달 21일 서울 신림역에 이어 지난 3일 경기도 서현역에서 이른바 묻지마 흉기 난동이 벌어지고 이런저런 소셜미디어에 살인 예고글이 뜨면서다. 뉴욕타임스는 서현역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속보로 전달하기도 했다.

4일 지하철 수인분당선 오리역에서는 장봉과 방패를 갖춘 경찰관 여럿이 오갔다. 오리역 7개 출입구에 각각 배치된 이들은 2인 1조로 움직이면서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승객들을 살폈다. 경찰 특공대(8명), 경찰관 기동대(23명), 순찰차(4명)로 꾸려진 중량급 경력이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잠실역에도 경찰관 6명과 지하철 보안관 6명이 역사 주변을 순찰하고 있었다. 인근에선 소방관 7명이 펌프차·구급차와 함께 대기하면서 만일의 상황에 대비했다. 경찰 관계자는 “범죄 발생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순찰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24일 인천에 사는 이모(26)씨가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수요일 신림역서 한녀 20명 죽일 것”이란 글과 흉기 구매 내역을 찍은 사진을 올렸다. 경찰이 작성자의 인터넷 주소(IP)를 추적하자 이씨는 자수했다. 이씨는 협박 혐의로 구속됐지만, 그 뒤로도 익명의 살인 예고글은 이어졌다. 이씨가 자수한 날 ‘오늘 밤 신림 일대에서 여성 1명을 강간 살인할 예정’이란 게시글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왔고, 경찰은 일주일 만에 작성자를 체포했다. 신림역 사건 이후 살인 예고글이 최소 27건 포착됐다. 4일 오전 1시쯤엔 여성 혐오성 표현과 함께 “내일 서면역 5시 흉기 들고 다 쑤시러 간다”는 제목의 글이 온라인상에 올라와 부산경찰청이 수사에 착수했다.

같은 날 서울 서초경찰서는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서 흉기를 소지하고 배회하던 20대 남성을 현행범 체포했다고 밝혔다. [사진 트위터]

같은 날 서울 서초경찰서는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서 흉기를 소지하고 배회하던 20대 남성을 현행범 체포했다고 밝혔다. [사진 트위터]

검증되지 않거나 허위·과장에 가까운 글도 섞여 있다. 하지만 이미 두 차례 ‘묻지마 범행’을 경험한 시민들의 공포감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고 있다. 오리역에서 꽃집을 운영하는 정모(37)씨는 “살인 예고글을 보고 직원들이 두려워서 못 나오겠다고 했다. 가게 문은 열었지만 매일 이렇게 불안에 떨어야 한다는 생각에 두렵고 막막하다”고 말했다. 서울 성북구의 한 대학에서 만난 김모(23)씨도 “예고 살인 지역은 아니지만, 혹시 몰라 인기척에 둔감해질까봐 늘 끼고 다니던 이어폰을 빼고 다닌다”며 “대인공포증이라고 생각해도 되니까, 이름은 밝히기 싫다”고 말했다. 김씨는 그러면서 친구에게 카톡으로 받은 ‘칼부림 예고 목록’을 보여줬다. ‘8월 4일 오늘. 서현역 〈추가〉 [남성 20명 살인 예고], 잠실역 [오전] !주의!’ 등의 내용이 있었다.

과거에 인터넷에 올라왔던 살인예고 글이 뒤늦게 부각되는 점도 문제다. 신림역 부근 빌라에 사는 직장인 김모(31)씨는 “올해 말 전세 계약 만료를 앞두고 신림은 일단 떠나야겠단 마음을 굳혔다”며 “그런데 이사 후보군 중 하나였던 성남에서 칼부림이 일어나면서 어디도 안전하지 않단 생각에 착잡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리스트’에 오른 지역의 상인들도 한숨을 내쉬었다. 서울 강남역 근처의 한 고깃집 사장은 “나도 지인이 문자로 건네 준 리스트를 봤는데, 한참 손님이 몰리는 시각과 물려 있어 당분간 장사는 어렵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마트를 30여 년간 운영해 온 김모(62)씨는 “신림역 사건 이후 유동인구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며 “순대촌 쪽은 열흘 넘도록 손님이 절반으로 줄었다며 울상을 짓더라”고 전했다.

묻지마 흉기 난동에 시민들의 공포감이 커지면서, 4일 방검복을 만드는 웨크론의 주가가 22%까지 급등하기도 했다. 방위사업 부문 업체인 웨크론은 이날 “현재 방검복을 생산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최근 잇따른 묻지마 흉기 난동과 살인 예고는 국민들로 하여금 타인에 대한 불신을 넘어 공포와 적개심까지 키운다”며 “국가 동력을 떨어뜨리는 또 다른 사회 불안 요소로 자리 잡기 전에 대통령이 주가 되어 빠르고 엄중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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