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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돈·세금으로 살잖아” 보상 받으려는 심리, 갑질로 폭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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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1호 10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갑질 공화국

지난 1월 14일 봉투를 안준다는 이유로 거제시 한 편의점으로 돌진한 차량. [뉴스1]

지난 1월 14일 봉투를 안준다는 이유로 거제시 한 편의점으로 돌진한 차량. [뉴스1]

“아저씨가 뭔 상관이야.”

지난 2일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 주차장. 고성이 울려 퍼졌다. 경비원은 얼음처럼 굳은 채 서있었다. 집에서 키우던 화분의 흙을 아파트 화단에 버리면 안 된다고 안내하자 입주민이 반발했던 상황. 큰 소리에 주변의 시선이 몰린 탓일까, 입주민이 자리를 피하며 상황은 일단락됐지만, 경비원은 억울하고도 난처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곳에서 5년째 일하고 있다는 경비원 김모씨(68)씨는 “한쪽에선 내 돈으로 월급 받으면서 별걸 다 참견한다는 말을 듣고, 한쪽에선 월급 받고 일 안 하냐고 항의한다”며 “경비원은 갑질을 참는 직업”이라고 푸념했다.

“나한테 월급 받으면서 일까지 시키네.”  박경숙(64)씨는 음식점 사장의 이 말이 가슴에 아직도 박혀 있다고 했다. 용역 업체를 통해 2년간 건물 청소를 하다 지금은 음식점에서 일하고 있다는 박씨는 “쓰레기통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길래 똑바로 버려달라고 했더니, 자식뻘 되는 사장에게서 그런 말이 돌아왔다”고 했다. 그는 ‘(너는) 내 돈으로 월급 받는 사람’이란 인식이 가장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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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우위에 있는 ‘갑’이 약자인 ‘을’에게 가하는 부당 행위를 뜻하는 ‘갑질’은 경비원 김씨만의 일도, 음식점 직원 박씨만의 일이 아니다. 갑질의 일상화와 만연화, 이른바 ‘갑질의 시대’다.

가족·연령 등 전통 위계 가치 퇴색

사장님이라고 사정이 다를까. ‘누군가에게 월급을 받지 않는 사장’도 갑질의 대상이다. 식당이나 카페, 편의점 등 자영업자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인 ‘아프니까 사장이다’엔 하루가 멀다 하고 갑질 사례가 쏟아진다. 눈앞에서 돈을 주고받다 보니 갑을 관계가 분명한 탓일까. 갑질을 넘어 형사 사건으로 확대된 경우도 부지기수다. 지난 1월 경남 거제시의 한 편의점을 방문한 40대 남성이 본인 소유 차량으로 편의점을 들이박아 현행범으로 체포되기도 했다. 편의점 사장이 무상으로 봉투를 제공할 수 없다고 하자 제대로 대접 받지 못했다고 판단한 손님은 실랑이를 벌였고, 고소까지 이어진 게 화근이었다. 결국 앙심을 품은 손님은 차량을 동원해 범행에 나섰고 특수재물손괴 혐의로 구속됐다.

이렇게 사회 전반에 갑질이 만연한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던 가치가 빠르게 변하면서 갑질의 양상이 변했다는 데 주목한다. ‘난 뭐하는 사람’ ‘당신 몇 살이야’란 표현은 역설적으로 사회적 지위나 연령 등이 사회적 위계를 드러냄을 반증해 왔다. 이렇게 전통적으로 위계를 드러내던 암묵적 가치가 퇴색한 대신, 돈 낸 만큼 제대로 대접받아야 한다는 보상심리가 최근 급격히 그 자리를 채웠다는 것이다. 여기에 목소리가 커야 제대로 대접받는다는 인식이 더해지면서 누구나 갑질 가해자가 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셈이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실제로 서울노동권익센터가 집계한 아파트 경비노동자 권리구제 상담 규모는 2021년 428건에서 지난해 1004건으로 급증했다. 이 수치가 증가했다는 건 갑질 피해로 상담을 신청하는 경비원이 늘었다는 뜻이다. 최항섭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는 “약자에 대한 배려 등 시민 의식은 성장하지 못했는데, (관리비를 냈다는) 보상심리를 입주민이 정당한 권리 찾기라고 인식하고 의식하든 못하든 갑질로 행하는 경우가 많다”며 “계약 관계에 따라 누구나 갑질을 주고받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사회가 펼쳐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일들에 눈살을 찌푸리던 사람이었는데, 제가 어리석은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일명 ‘람보르기니 주차 갑질’로 최근 도마에 오른 유명 미용실 원장의 사과문도 최 교수의 설명과 맥락이 닿는다. 이 사건은 수억 원을 호가하는 자신의 차량에 주차 단속 스티커가 붙자 화가 난 차주가 경비원에게 직접 떼라고 요구한 게 발단이다. 경비원이 이를 거부하자 해당 차주는 아파트 경비실 입구를 차량으로 막아버려 공분을 샀다. 그러나 이 아파트는 주차할 곳이 부족해 늦은 시간 퇴근하는 입주자는 주차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남들의 갑질에 부정적이던 사람도 자신의 권리가 훼손됐다는 생각이 들면 언제든 갑질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갑질 피해자와 가해자는 구분하기 어려운 사례도 늘고 있다. 지난달 20일 경기도 수원시의 한 카페에서 벌어진 이른바 ‘스무디 투척 사건’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누가 가해자인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당시 매장을 방문한 40대 남성은 손님 응대가 불친절하단 이유로 카페 사장의 얼굴에 음료를 던진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까지만 보면 전형적인 손님의 갑질이지만, 이에 앞서 카페 사장도 손님 앞에서 종이 캐리어를 던지는 모습이 공개되면서 여론은 양쪽 모두에 책임이 있다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우리 사회가 다른 가치보다 자신의 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무한경쟁을 지목한다. 우리 사회가 점점 더 승자독식 구조로 흘러가는 탓에 경쟁에서 우위에 선 사람이 그 아래의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데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코로나·불황 이어져 피해의식 누적

더구나 경쟁 과정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인식은 갑질을 통해 열등감과 상실감을 해소하고자 하는 욕구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최환석 맑은샘정신건강의학과 원장은 “의학적으론 열등감이나 상실감 등이 쌓이다가 분노로 표출되는 것을 갑질로 본다”며 “한국은 워낙 남들과 비교에 익숙한 탓에 조금이라도 경쟁에 밀렸다거나 손해를 봤다는 피해의식이 쌓이기 쉬운데, 이렇게 쌓인 피해의식이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상대를 만나 폭발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최근 문제가 된 학부모 갑질 문제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학부모 갑질 사례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내 세금으로 월급 받는다”는 폭언이 다른 갑질 사례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학부모들의 무한경쟁과 보상심리 짜깁기가 갑질의 진짜 원인이라는 얘기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치료학과 교수는 “내 아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학부모의 피해의식을 교사들에게 투사하는 것이 학부모 갑질의 본질”이라며 “피해의식은 깊어졌는데, 교권은 예전만 못하니 만만한 교사를 만나면 갑질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 전반에 스며든 갑질을 해소할 방법은 없을까. 부모님을 따라 프랑스에서 생활하다 귀국한 직장인 정지영(28)씨의 경험담은 참고할 만하다. 정씨는 “프랑스에선 음식점이나 카페 등에서 직원에게 인사하지 않으면 손님 대접을 받지 못하는데 한국에선 주문과 계산 등 꼭 필요한 말만 하는 게 기계를 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며 “그만큼 직원을 손님과 동등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도 상호 존중이 우선시돼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누구나 갑질 가해자가 될 수 있을 만큼 사회 전반의 문제로 부상한 탓에 가장 근본적인 부분부터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최항섭 교수는 “한국에선 어린 시절부터 경쟁이 일상이다 보니 상대방을 동등한 인격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누가 우위에 있는지 따진다”며 “우위에 서면 대접이 달라지는 걸 체험하고 성장하는 구조를 뜯어 고쳐 타인에 대한 존중을 배우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사회적으로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코로나19 확산을 거쳐 경기가 침체되는 등 최근 수년간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늘면서 피해의식이 누적된 경향이 있다는 얘기다. 임명호 교수는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 이어지다 보니 작은 일에도 손해 보기 싫다는 심리가 더 강하게 작동한다”며 “돈 낸 만큼 제대로 대접받아야 한다는 보상심리가 갑질로 터져 나오지 않도록 사회적으로 해소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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