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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센 전집 펴낸 김미혜 교수, 노르웨이 왕실 공로 훈장 받아

중앙일보

입력

"헨릭 입센(1828~1906)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19세기의 아방가르디스트'죠. 당시 유럽에는 상업극만 있었거든요. 그런 시대에 인간의 자유 의지나 젠더 불평등을 주제로 극을 쓴 사람은 입센 뿐이었어요. 선구자였죠."

근대 연극의 아버지로 불리는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릭 입센. 사진 비짓노르웨이닷컴

근대 연극의 아버지로 불리는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릭 입센. 사진 비짓노르웨이닷컴

'입센 전문가'로 알려진 김미혜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명예교수(75)는 3일 서울 성북구 노르웨이 대사관저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노르웨이 작가 헨릭 입센의 전작을 번역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날 대사관저에서 노르웨이 왕실 공로 훈장을 받았다. 과거에도 한국 외교관이나 경영인이 노르웨이 왕실 공로 훈장을 받은 적은 있지만, 문화계 인사가 훈장을 받은 것은 김 교수가 처음이다.

입센 전집을 번역한 공로로 3일 노르웨이 왕실 공로 훈장을 받은 김미혜 한양대 연극영화과 명예교수(왼쪽)과 안네 카리 한센 오빈 주한 노르웨이 대사.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입센 전집을 번역한 공로로 3일 노르웨이 왕실 공로 훈장을 받은 김미혜 한양대 연극영화과 명예교수(왼쪽)과 안네 카리 한센 오빈 주한 노르웨이 대사.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김 교수는 입센을 번역하기 위해 노르웨이어를 독학했다. 그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고 오스트리아 빈에서 연극학 박사학위를 받아 영어와 독일어에 능통하다. "입센은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작가인데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요. 저도 연극을 공부하면서 입센 작품을 읽었는데, 영어 번역본과 독어 번역본의 뉘앙스가 제각각이더라고요. '원어로 읽지 않으면 평생 입센을 모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2007년 시작한 번역 작업은 15년 만에 결실을 봤다. 지난해 10권 짜리 '입센의 희곡 전집'을 펴내면서다. 그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생을 한다는 생각에 외롭기도 했다"며 "전집을 출판하고 난 후에 연극계의 여러 선생님이 연락을 해서 '수고했다', '누군가 꼭 해야 할 일이었다'며 격려해주시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했다. 그가 입센 희곡 전집을 내기 전까지 한국어로 나온 입센의 작품은 모두 노르웨이어를 독일어나 영어로 번역한 뒤 다시 한번 한국어로 바꾼 중역본이었다.

지난해 6월 출간된 김미혜 교수의 입센 전집. 총 10권이다. 전민규 기자

지난해 6월 출간된 김미혜 교수의 입센 전집. 총 10권이다. 전민규 기자

이날 인터뷰에 함께 한 안네 카리 한센 오빈 주한 노르웨이 대사(58)는 김 교수가 펴낸 입센 전집에 관해 "희곡 번역은 문화와 역사에 대한 높은 이해가 필요한 일"이라며 "김 교수의 작업 과정을 지켜보며 단순히 언어 실력 뿐 아니라 문화적 소양과 창의력이 뛰어난 분이라고 느꼈다. 이번 계기로 양국의 문화적 교류가 더 활발해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오빈 대사는 입센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구절로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가 남편에게 외치는 대사("나도 그저 당신과 같은 인간일 뿐이에요")를 골랐다. '인형의 집'은 1879년 발표된 최초의 페미니즘 희곡이다. 결혼과 남녀의 역할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자아를 찾아 가정을 떠나는 주인공 노라는 '노라이즘'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킬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김 교수는 "노라가 집을 나가기 전에 '나는 세상에 대해 배우고 싶다'고 외치는 장면이 있다"며 "좁게는 여성주의 희곡이라고 볼 수 있지만 크게 보면 관습에 저항하는 한 인간의 이야기이며 현대인들에게도 충분히 와닿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했다.

안네 카리 한센 오빈 주한 노르웨이 대사(왼쪽)와 김미혜 한양대 연극영화과 명예교수가 3일 오후 서울 성북구 노르웨이 대사 관저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안네 카리 한센 오빈 주한 노르웨이 대사(왼쪽)와 김미혜 한양대 연극영화과 명예교수가 3일 오후 서울 성북구 노르웨이 대사 관저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요즘 한국 연극을 보면 연출이나 연기, 무대 디자인은 수준급인데 희곡이 여전히 약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번역의 문제, 자본의 문제로 레퍼토리가 제한됐던 것도 사실이고요. 한국 연극의 기반이 넓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전집을 펴냈습니다. 한국 관객들도 입센의 극을 더 자주 접할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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