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단독] "자료 충분" 법원 판결에도…인권위, 강제북송 사건 또 각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국가인권위원회가 탈북어민 강제북송과 관련한 진정 사건에 대해 판단하지 않고 사건을 종결한 것으로 1일 확인됐다.

국회 운영위원회 소속 정경희 국민의힘 의원에 따르면, 인권위는 지난 6월 26일 송두환 위원장을 비롯한 인권위원 11명 중 10명이 참석한 전원위원회에서 탈북어민 강제북송 사건을 논의하고 찬성 6명, 반대 4명으로 각하 결정을 내렸다. 인권위는 “현재 해당 사건에 대한 형사 재판이 시작된 만큼 피해자의 권리 구제 절차가 진행 중이고, 자료 제출이 이뤄지지 않아 피진정인들에 대한 조사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 등을 고려해 진정 사건을 각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다만 인권위는 통일부에는 북한 주민 송환과 관련한 법령 정비, 대통령실 국가안보실과 국가정보원에는 월선한 북한 주민에 대한 내부 업무추진 절차 및 제도 개선을 권고하기로 했다.

 통일부는 2019년 11월 판문점에서 탈북어민 2명을 북한으로 송환하던 당시 촬영한 사진을 지난해 7월 12일 공개했다. 사진 통일부

통일부는 2019년 11월 판문점에서 탈북어민 2명을 북한으로 송환하던 당시 촬영한 사진을 지난해 7월 12일 공개했다. 사진 통일부

문재인정부는 2019년 11월 2일 동해 북방한계선(NLL) 인근에서 해군이 나포한 북한 선원 2명을 5일 만에 북한으로 추방했다. 이들은 조사 과정에서 귀순 의사를 밝혔지만, 다른 선원들을 살해한 혐의가 발견돼 강제 송환됐다. 이에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모임’(한변)은 같은 달 11일 “헌법·유엔(UN)고문방지협약·북한이탈주민법 등에 반하는 인권침해”라며 인권위에 진정을 냈다.

하지만 인권위는 약 1년 만인 2020년 11월 23일 ‘위원회가 조사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인정되는 경우’(인권위법 32조 1항 7호)에 해당한다며 각하했다. 피해자인 탈북어민들이 이미 추방돼 그들의 의사와 사건 경위 파악이 어렵고, 인권위 조사 권한 한계상 정보 접근에 상당한 제약이 있다는 등의 이유였다.

그러자 한변은 2021년 1월 4일 인권위의 이런 각하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을 냈다. 그리고 법원은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인권위의 각하 결정을 취소했다. 1심 재판부(서울행정법원 행정14부)는 인권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서도 의견을 표명한 적이 있다고 지적하며 “이 사건과 관련해선 진정의 본안 판단에 나아가기에 충분한 정도의 자료수집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1심 판결을 인용한 항소심 재판부(서울고법 행정8-2부)도 “인권침해에 가장 취약한 자들은 진정 절차와 같은 인권보호제도에 호소할 수 없는 입장인 경우(당사자 실종·사망·구금 등)가 많아 피해자들의 의사를 확인할 수 없다는 건 각하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 판결은 지난해 11월 8일 인권위의 상고 포기로 확정됐다.

하지만 사건을 재검토한 인권위는 약 8개월 만에 사유만 바꿔 다시 각하했다. ‘진정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 이후라도 수사와 재판이 이뤄지고 있거나 종결된 경우라면 각하할 수 있다’는 인권위법 32조 1항 5호, 32조 3항을 근거로 들었다. 서울중앙지검 공공수사3부(부장 이준범)는 지난해 7월 국정원 고발에 따라 이 사건을 수사한 뒤 지난 2월 28일 노영민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 서훈 전 국정원장,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 등을 국정원법상 직권남용과 허위공문서작성·행사 등의 혐의로 불구속기소했다. 현재 서울중앙지법에서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2020년 7월 3일 신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 임명된 서훈 전 국정원장이 청와대 춘추관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다. 왼쪽은 직후 외교부 장관이 된 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 청와대사진기자단

2020년 7월 3일 신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 임명된 서훈 전 국정원장이 청와대 춘추관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다. 왼쪽은 직후 외교부 장관이 된 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 청와대사진기자단

하지만 인권위 안팎에서는 비판이 나왔다. 한 인권위 관계자는 “각하 사유인 인권위법 32조 3항은 국가기관 사이 절차의 중복, 결론의 모순을 방지하기 위한 임의규정”이라며 “인권위는 법원과 달리 유무죄가 아닌 인권침해 여부만 판단하는 기관인데, 자체 조사를 대부분 마친 상황에서 기계적으로 각하한 건 비겁한 결정”이라고 말했다. 인권위는 2019년 11월 진정 접수 이후 진정인·피진정인 조사를 거쳐 최근 통일부가 공개한 판문점 북송 영상과 검찰 공소장에 대한 조사까지 마친 것으로 파악됐다. 통일부 영상에는 탈북어민들이 강하게 저항하는 모습이 담겼다. 그런데도 본안 판단을 하지 않은 건 법원 판결의 취지에서 벗어난 결정이라는 비판이다.

이 사건 논의 과정에선 문재인정부 시절 임명된 인권위원과 윤석열정부에서 새로 임명한 인권위원 사이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반대의견을 제시한 4명의 인권위원은 탈북어민 강제북송을 주도한 국가안보실과 국정원, 통일부에 대해 “탈북어민의 의사에 반한 인권침해 행위로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익명을 요청한 한 법조계 인사는 “인권위가 각하 결정에 이례적으로 정책권고를 덧붙인 건 비판 여론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경희 의원은 “정치적 중립성을 견지해야 할 인권위가 문재인정부에서 임명된 인사들로 채워지는 바람에 탈북민의 인권은 내팽개치고 전 정권을 비호하는 조직으로 변질됐다”고 비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