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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딸이네요" 산부인과 금지된 대화…또 헌재 심판대 올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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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 전경. 중앙포토

헌법재판소 전경. 중앙포토

“혹시 딸이에요, 아들이에요?”
“…애가 참 늠름하네요, 여기 가운데 보이시죠?”

산모와 산부인과 의사가 초음파 검사를 하며 이런 알쏭달쏭한 대화를 하게 만드는 의료법의 ‘태아 성감별 금지’ 조항이 헌법재판소 심판대에 올랐다. 2008년 한 차례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왔지만, 이후 개정된 법도 여전히 태아 성별을 일정 기간 알려주지 못하게 돼 있다.

‘태아 성별 알려주면 안된다’ 의료법 20조 2항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3월과 올해 2월 접수된 ‘의료법 20조 2항 위헌확인’ 사건 2건을 병합해 심리 중이다.

의료법 20조 2항은 태아의 성별을 감별하고, 이렇게 알게 된 태아의 성별을 임산부 당사자에게도 알려주지 못하도록 규정한다. 과거 남아(男兒)선호사상이 극심하던 시절, 미리 태아의 성별을 확인해 딸이라면 낙태하는 걸 막기 위해 만들어진 조항이다.

용어사전의료법 제20조(태아 성 감별 행위 등 금지)

1항. 의료인은 태아 성 감별을 목적으로 임부를 진찰하거나 검사하여서는 아니 되며, 같은 목적을 위한 다른 사람의 행위를 도와서도 아니 된다.

2항.의료인은 임신 32주 이전에 태아나 임부를 진찰하거나 검사하면서 알게 된 태아의 성(性)을 임부, 임부의 가족, 그 밖의 다른 사람이 알게 하여서는 아니 된다.

“부모 인격권, 의사 직업자유 침해” 주장

 산전 초음파 장면 예시.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음. 사진 미국 존스홉킨스병원 홈페이지

산전 초음파 장면 예시.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음. 사진 미국 존스홉킨스병원 홈페이지

이 조항이 위헌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두 가지다. 우선 부모 입장에선 태아 성별 정보에 대한 접근을 방해받지 않을 권리가 막혀 헌법 10조에서 규정한 인격권을 침해받는다는 것이다. 또 의사 입장에선 진료상 알게 된 환자의 진료 정보를 환자(임산부) 당사자에게도 고지하지 못 하게 해 헌법 15조의 직업수행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점도 들었다.

청구인 측은 “이제 남아선호사상이 사실상 사라져 성 감별로 인한 낙태가 거의 없고, 낙태죄도 폐지됐다”며 “현실에서는 ‘분홍색 옷 사셨어요?’ ‘애가 참 씩씩하네요’ ‘저기 가운데 보이시죠?’ 등 암묵적인 표현으로 성별을 알려줘 사실상 사문화된 법”이라는 점도 주장한다.

의사협회 “성감별 금지 실효성 잃어, 지금은 오히려 필요”

태아 초음파 영상 예시.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음. 사진 미국 메이요의학교육연구재단

태아 초음파 영상 예시.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음. 사진 미국 메이요의학교육연구재단

대한의사협회도 지난 26일 헌재에 “2010년대 중반부터는 출산 순위와 관계없이 자녀 성별에 대한 인위적 개입이 거의 없어져 성감별 금지 조항은 실효성을 상실했다”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현재 낙태는 대부분 태아 성감별이 불가능한 초기 임신기에 이뤄져 성 감별과 관계없다고도 했다.

의협은 또 “태아 성별 확인을 원하는 건 부모인데 고지해준 의사만 처벌하는 규정은 불합리하며, 의료인이 아닌 사람은 처벌하지 않기 때문에 인터넷에 초음파 사진을 올리고 성별을 알려달라는 경우도 있다”고 지적했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출산연령 상향 등으로 고위험임신이 증가해 오히려 “성 감별이 의학적으로 필요하다”고도 설명했다.

헌재는 2008년 재판관 8명이 위헌, 1명이 합헌 의견을 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당시 헌재 결정문은 모자보건법상 낙태가 불법이 아닌 28주가 지나면 성별 감지를 허용하라는 취지였다. 국회 입법 과정에서 이게 ‘32주 이상’으로 바뀌었다. 의협은 이 ‘32주 규정’에 대해서도 “아무런 의학적 근거가 없다”는 의견을 헌재에 제출했다.

반면 보건복지부는 “남아선호사상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단언할 수 없고, 임신 전(全) 기간에 걸쳐 성별 고지를 허용하는 건 부당하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헌재에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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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아빠 변호사들이 청구인 

이번 헌법소원 2건의 청구인은 모두 30대 ‘아빠’ 변호사들이다. 지난해 헌법소원을 낸 강성민(38) 변호사는 변호사시험‧공무원시험 수험생들 사이 ‘1타강사’로 통하는 헌법 강사다. 몇 년 전부터 이 의료법 조항에 위헌성이 있다고 생각하던 차에 마침 지난해 3월 아내의 임신을 확인하고 헌법재판소 문을 두드렸다. 청구인 적격이 생기자마자 행동에 옮긴 것이다.

올해 2월 헌법소원을 낸 노필립(33) 법무법인 오현 변호사는 첫째 아이 때도 성별을 알려주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다가, 아내가 둘째를 임신한 지 4~5개월쯤 됐는데도 산부인과에서 성별을 알려줄 수 없다고 하자 헌법소원을 냈다.

강 변호사는 “이미 암묵적으로 성별을 알려주고 있고 경찰 수사도 거의 없으며 형벌로 인한 범죄 억제력도 상실한 사실상 사문화된 조항”이라며 “그런데도 이런 금지조항이 남아있어 모든 엄마·아빠들과 의사들이 불법을 저지르게 방치하고 있는 건 문제이고, 현실에 맞게 법을 다듬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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