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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원자탄 개발한 오펜하이머 “핵은 위험” 인류에 경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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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새로운 앞날 만들어가는 자기 성찰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원자탄 개발의 책임자였던 과학자 오펜하이머의 일생을 다룬 영화가 요즘 화제다. 그는 1945년 원자탄 개발을 진두지휘했다. 2차 세계대전을 끝낸 영웅으로 시사주간지 타임 표지에도 등장했다. 그런데 오펜하이머 평전을 쓴 작가는 그에게 ‘미국의 프로메테우스’라는 부제를 붙였다.

영웅 대접받던 오펜하이머, 수소폭탄 반대하며 공직서 쫓겨나
1991년 이항녕 홍대 총장 “하동군수 때 일제 징병 도와” 고백
DJ에 정치적 부채 있다는 JP의 회고록도 한국 사회에 큰 울림
8·15 앞두고 생각하는 역사 문제…과거 성찰이 미래를 열어가

미국의 프로메테우스, 영광과 좌절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사진 유니버설픽쳐스]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사진 유니버설픽쳐스]

그리스 로마 신화 속의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반대에도 인간에게 불을 전해주었고, 그로 인해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았다. 또한 화가 난 신은 인간에게도 판도라의 상자를 열도록 하여 큰 재앙을 주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갈 기회와 큰 고통을 받을 가능성을 동시에 준 것이다.

오펜하이머가 책임자였던 맨해튼 프로젝트는 인간이 원자력을 이용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주로 화석연료 에너지를 사용해 왔던 인류역사에 큰 변곡점이 되었다. 그러나 원자탄은 인류가 공멸할 수 있는 위험성도 던져주었다. 핵무기뿐만이 아니다. 원자력의 평화적 사용을 위해 세운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발전소에서 재앙이 발생하기도 했다.

오펜하이머의 후회

오펜하이머

오펜하이머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이 사용되자마자 그 위험성을 인식했다. 더 이상 핵무기가 개발되거나 사용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매카시즘 시대에 그는 핵 통제 필요성을 건의했고, 수소폭탄 개발을 반대했다가 공산주의자 혐의를 받았다.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이제 그는 더이상 영웅이 아니었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탄을 개발했지만, 원자력이 무기로 사용될 때 인류에게 재앙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경계했다. 히틀러의 핵무기 개발 시도를 알게 되면서, 독일보다 미국이 먼저 나서야 한다고 건의했던 실라르드 박사도 막상 원자탄이 개발되자 그 사용을 반대했다. 살라르드 박사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탄 개발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낼때 자신의 이름으로 사인했던 아인슈타인 역시 핵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오펜하이머가 참여하지 않았다면, 원자탄이 개발되지 않았을까. 2차 대전 중 독일뿐만 아니라 일본도 원자탄을 개발하려 하였고, 영국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만약 1943년 퀘벡회담에서 영국이 미국에 기술 이전을 하지 않았다면, 일본이 항복하기 이전에 원자탄이 나오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오펜하이머가 아니었어도 원자탄은 결국 태어났을 것이다.

원자탄이 사용되지 않았다면

원자탄 사용이 일본의 항복을 앞당긴 것은 사실이다. 물론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졌을 때도 일본 정부에서는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어쩌면 소련군 참전이 일본의 조기 항복에 더 큰 요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왕은 원자탄이 일본의 전쟁 중단에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이른 항복으로 미군이 본토 상륙작전을 실행하지 않았기에 수많은 미군의 목숨을 살렸다는 사실 역시 부인할 수 없다.

원자탄이 사용되지 않았다면 소련군의 참전이 늦어지거나 참전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없었을까. 미군 전략사무국(CIA의 전신)의 훈련을 받은 한국광복군이 국내에 진공 작전을 펼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당시 미 해군에서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떨어진 ‘리틀보이’나 ‘팻맨’ 없이도 해상봉쇄를 통해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역사에서 가정은 매우 흥미롭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확한 답을 줄 수는 없다. 원자탄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한국이 해방되지 않았고, 지금도 일본 제국의 일부로 계속되었을 가능성은 없었을까. 이 가정은 80년 전인 1943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한국의 독립을 규정했던 카이로 선언에 위배되기에 잘못된 추정이라고 분명히 얘기할 수 있다.

오펜하이머의 인생을 보면서 주목되는 점은 그 스스로가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봤다는 점이다. 자신의 행동이 과연 인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성찰한 것이다. 원자탄 개발 과정과 마찬가지로 그가 반대했어도 수소폭탄은 개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비롯한 과학자들의 성찰은 이후 원자력 사용에 대한 경종을 울렸다.

50년 전 과오 반성한 이항녕 전 총장

이항녕

이항녕

한국 현대사에서도 자신의 성찰이 한국 사회에 큰 경종을 울린 경우가 있다. 1991년 7월 10일 경남 하동초등학교 강당에서 바르게살기운동 하동군협의회의 초청을 받아 단상에 오른 이항녕 전 홍익대 총장은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았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부터 50년 전인 1941년 하동군수로 부임해 1년간 재직한 적이 있습니다. 사과한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저는 그 당시 공출 실적을 올리기 위해 (중략) 군민들을 괴롭혔던 사실을 사과드립니다. 저는 하동군수로 1년, 창녕군수로 3년간 있었는데 그때는 징용·징병·학병을 보내기 위한 일을 했습니다. 그때 그렇게 집을 떠나야 했던 분들 가운데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일본의 앞잡이로서 그런 일을 저질렀던 나쁜 죄인이었습니다.”(이상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

1945년 9월 당시 충청남도 광공업 부장은 “고급관리로 일한 친일파이기 때문에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이 마땅하다”며 그해 9월 충남도지사로 부임한 미군정 육군 대령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는 시점에서 자신들의 부일 협력에 반성하면서 검사 8명이 사표를 낸 사례도 있다. 일제강점기 교사였던 분 중 평생을 반성하면서 동대문구 회기동 주변의 쓰레기를 주웠던 분도 있다.

프로 잡(Pro Job)? 프로 잽(Pro Jap)?

일생을 살면서 과거를 성찰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시 자신과 같은 일을 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군정 하에서 부일 협력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에 협력하기 위한 것인지(Pro Jap), 아니면 직업에 충실했기 때문인지(Pro Job)에 대한 논란이 이는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시대를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시대의 조류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그 모든 것을 탓한다면 누구도 과거의 행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시대가 바뀐 이후 과거를 성찰하는 것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2000년 이후 한국의 천주교와 조계종,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과거 문제에 대한 입장문을 내놓았던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한국 정치의 한 획을 그었던 JP(김종필)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자신의 53년 정치인생을 돌아보았다. 그는 중요한 정치적 이슈를 회고했지만, 그중에서도 과거 문제와 관련하여 두 개의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유신 시절 죽음의 고비를 넘긴 DJ(김대중)에 대한 부채였다. 1997년 대선 과정에서의 DJP 연합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중앙청 국기게양대 남겼더라면”

다른 하나는 1995년 중앙청 철거의 아쉬움이었다. 그는 차지철 경호실장의 유명한 스토리를 만들어냈던 중앙청 국기게양대라도 남기기를 원했다. 유물을 통해 과거를 성찰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다. 만약 친일 잔재 문제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졌다면, 중앙청도 옮겨서 보존하는 것이 가능했을 수도 있다고 보았다.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의 재앙에 대해 성찰하지 않았다면, 그는 미국의 영웅이자 정부의 고위 공직자로서 인생을 마감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1948년 사표를 냈던 검사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를 성찰했고, 미래를 고민했다. 아마도 그러한 고민이 좀 더 큰 물결을 만들어냈다면, 국립묘지에 있는 일부 인사들과 관련된 문제가 제기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자기 성찰은 그들 자신에 대한 평가와 함께 후손들에게 논란거리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히틀러를 경계하며 원자탄을 만들었고, 그것을 시험해 보고 싶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똑똑했던 젊은이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들의 능력을 발휘했다. 단지 일본 군국주의를 위한 것이었겠는가. 그럼에도 오펜하이머 박사, 이항녕 전 총장, 그리고 JP의 회고가 2023년 8·15를 앞둔 지금 또 다른 울림을 주고 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