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의 「비례판매론」/전영기 정치부 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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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김대중 평민당 총재는 5일 기자간담회에서 실수인지,「속앓이」의 토로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이례적인 발언을 했다.
현재 진통중인 지자제선거법 협상의 최대쟁점의 하나인 비례대표제 도입문제에 대해 「비례판매론」을 언급한 것이다.
『오죽하면 비례라도 팔아서 선거자금을 마련해야 하는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선거를 치를 수 없도록 정치자금을 독식한 것이 누구냐』고 여당을 비난하면서 정치자금과 비례대표제 사이의 「깊은 관계」를 평소 신중한 그답지 않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물론 김 총재 발언의 전체맥락은 ▲공무원 등 행정 유경험자의 지자제 참여 ▲소수그룹인 여성 대표의 참여 등을 가능토록 하기 위해 비례대표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논리적 주장이 주조였다.
그런데 기자들과의 일문일답 중 나온 이 얘기대로라면 비례제는 전혀 다른 의미도 갖게 되는 셈이다.
3당합당 후 엄청나게 「돈줄」이 조여진 야당의 속앓이를 하소연한 것인지,아니면 정치자금에 대한 개선방안을 역설적으로 말한 것인지 모르겠다.
사실 정당의 공식적인 정치자금 조성현황을 보면 ▲국고보조금 1백10억 중 민자당 75억,평민당 25억,민주당 10억원 정도가 연간 배분되고 ▲지난 82년부터 89년까지 선관위를 통해 각당에 지정기탁된 자금 8백63억원 중 95%가 민정당에 나갔으며 ▲개별의원에 대한 후원회도 평민당은 거의 만들어지지 않은 현실에서 일단 김 총재의 발언을 이해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비례를 판다』는 말에 긍정적인 이해를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전국구 의원을 둘러싸고 숱한 추문과 금품수수설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는데 그것을 공공연하게 얘기하는 심중을 잘 알 수가 없다.
더욱이 현행 정치자금법은 여소야대시절 평민당이 주도적으로 나서 입법한 것이다.
스스로 자생력을 키우기 위한 합법적인 후원회를 만들어보도록 노력해야지 「공작정치」 운운으로 이런 노력을 회피하는 것은 『잘한 것은 내 탓이고 잘 못된 것은 네 탓』으로 돌리려는 구태가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파는 대상인 비례제­. 그것이 우리의 정치현실인지도 모르지만 그 때문에 우리 정치는 한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씁쓰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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