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픈뱅킹의 역설…나만 아는 ‘스텔스 계좌’ 해마다 급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30대 남성 A씨는 최근 돈 관리 문제로 고민이다. 평소 A씨의 주식 투자를 못마땅하게 여긴 아내가 공용인증서(구 공인인증서)를 공유해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한 은행의 인터넷뱅킹 앱·사이트에서 거의 모든 금융회사 계좌를 한 번에 조회할 수 있는 ‘오픈뱅킹’ 서비스를 이용 중인 A씨 입장에서는 인증서를 공유하는 게 쉽지 않다. 비상금 통장은커녕 각종 투자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된다는 생각에서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A씨 같은 이들이 찾는 게 ‘스텔스 계좌’로 불리는 은행의 보안계좌 서비스다. 온라인으로 조회가 불가능하고, 예금주 본인이 직접 은행을 방문해야만 입출금 거래를 할 수 있다. 적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지 않아 존재를 알 수 없는 스텔스기와 비슷하다고 해 ‘스텔스 계좌’라는 별명이 붙었다.

2007년 보이스피싱 등 온라인 금융사기 피해가 심해질 때 이를 예방하는 목적에서 등장했는데, 2019년 말 오픈뱅킹이 전면 시행되면서 더욱 주목받았다. 당시 배우자에게 인증서를 맡겨둔 사람에겐 ‘발등의 불’이었다. 그간 주거래 은행이 아닌 곳에 비상금 계좌를 만들어놓고 관리했는데, 인증서만 있다면 오픈뱅킹 서비스로 얼마든지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4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 스텔스 계좌 신규 등록 건수는 2019년 22만9000건에서 오픈뱅킹 도입 후 매년 증가 추세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25만9000건, 올해는 6월까지 벌써 25만3000건이 새로 등록됐다. 이 추세라면 올해 50만건을 넘어설 수 있다.

이는 오픈뱅킹 등 이용자 편의에 맞춰 기술이 발전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반작용도 커지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개인의 민감한 사생활인 ‘금융 프라이버시’가 남에게 들춰질 수 있다는 고민에서다. 특히 과거에는 ‘비상금 숨기기’가 남편만의 고충처럼 여겨졌지만, 맞벌이 가정이 많아지면서 옛말이 됐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스텔스 계좌는 잔액을 확인하거나 돈을 뽑기 위해선 직접 은행에 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며 “돈을 넣어 두고 잊어버리면 잘 안 쓰게 된다는 점을 노리고 저축 용도로도 쓰는 고객도 있다”고 귀띔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