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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고교 파워인맥’ ③] 항일정신 잇는 호남인맥의 産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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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호남지역 최고의 명문 광주제일고등학교(이하 광주일고)는 오랜 시간 불리한 환경을 딛고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호남 출신 명사들을 길러낸 산실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광주일고 출신들은 유달리 결속력이 강하다. 그들의 면면.


광주일고 동문들은 학교 이야기를 물으면 가장 먼저 “누구누구가 우리 학교 출신”이라는 말 대신 “광주학생운동의 진원지”라는 말부터 꺼낸다. 소위 명문 고등학교라고 불리는 여타 학교와는 다른 차원의 자부심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들은 스스로 “아무리 억눌러도 할 말은 하고, 살 길은 알아서 찾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말대로 광주일고 출신 중에는 ‘풍운아’가 많다. 관행에 얽매이지 않고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으로 새로운 길을 찾아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인물들이다. 보수적이기로 이름났던 은행에 ‘투자금융기관’의 개념을 도입하는 파격을 선보인 김정태 전 국민은행장, 학창시절부터 증권가로 출근하다 ‘증권업계의 기린아’로 등장한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등이 대표적이다. ‘소액주주의 권리’를 주장하며 대기업들을 진땀나게 했던 장하성 고려대 교수는 또 다른 측면에서 풍운아로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다.

자기주장이 강한 이들은 서로 생각이 다를 경우 충돌도 마다하지 않는다. 최근 기업이 창출한 이익을 투자와 배당 가운데 어느 쪽에 우선순위를 둬야 할지를 놓고 논쟁을 벌이고 있는 박현주 회장과 장하성 교수는 고등학교 선후배이자 대학 선후배 사이다. 두 사람은 펀드 운용에 직·간접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공통점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펀드를 통한 기업 경영참여에 대해서도 엇갈린 시각을 드러내 눈길을 끈다.

1998년 우리나라에 뮤추얼펀드를 처음 선보이며 간접투자 붐을 주도한 박현주 회장은 최근 “외환위기 이후 기업 설비투자가 크게 줄면서 잠재성장률도 낮아지고 있다”며 “투자가 부진하면 기업의 성장도 어렵고, 고용사정도 악화돼 결국 젊은이들의 희망까지 앗아가게 된다”고 기업 투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장하성·박현주 ‘펀드 역할’ 놓고 시각차

그는 “투자냐 배당이냐는 기업이 결정할 문제지만 부당하게 배당을 요구하는 것은 문제”라고도 했다. 박회장은 “미래에셋이 지분을 보유한 기업 중 투자 없이 배당에만 전력하는 기업은 주주총회에서 이의를 제기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왼쪽부터 고홍식 삼성토탈 사장, 김정태 전 국민은행장,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 박상배 전 산업은행 부총재

그러나 ‘장하성펀드’로 불리는 한국기업지배구조펀드(KCGF)를 통해 기업의 지배구조를 개선하겠다고 나선 장하성 교수는 기업 투자 못지 않게 주주의 이익을 위한 배당도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장 교수는 “기업이 투자할 곳이 없다면 주주에게 배당하는 것이 국가경제 활성화를 위해 바람직하다”면서 “기업이 배당도 하지 않은 채 현금만 쌓아 둔다면 국가경제를 망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KCGF를 통해 일정 지분을 확보한 태광산업과 대한화섬에 대해 “투자할 데가 없어 현금을 쌓아 놓고 있으면서 주주에게 배당도 하지 않는 대표적 사례”라고 비판했다.

펀드를 통한 기업의 경영 참여를 둘러싸고도 박 회장과 장 교수는 뚜렷한 시각차를 보인다. 장 교수는 KCGF를 통해 대한화섬 지분 5.15%를 확보하면서 “경영에 참가해 지배구조를 개선하겠다”는 목적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그러나 박 회장은 “펀드의 영향력이 커졌다고 해서 교만해져서는 안 된다”며 “투자자가 뭐든 할 수 있다기보다 기업의 장기 이익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또 “기업에 대한 경영간섭이 심해지면 펀드시장도 위축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의 지론대로 미래에셋 계열 자산운용사들은 5% 이상 지분을 가진 기업의 투자 목적을 ‘단순투자’로 명시하고 있다.

박 회장과 장 교수는 기업 투자와 배당, 펀드의 경영참여에 대해 서로 다른 시각을 갖고 있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겉으로는 논쟁이 번지는 것을 꺼리는 눈치다. 장 교수는 “박현주 회장과 서로 대립각을 세울 이유가 전혀 없다”면서 “이윤만 쌓아둔 채 투자도, 배당도 안 하는 기업은 문제라는 취지에서 한 말”이라고 밝혔다. 박 회장도 “장하성펀드는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데 긍정적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며 “우리나라 자본시장은 다양한 펀드를 통해 올곧은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은 그가 가업을 일으키기 전 몸담았던 동원증권에서 놓아주지 않으려고 해 애를 먹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박 회장은 나이 마흔이 되면 창업할 수 없을 것 같다며 이사 재직 시절인 서른아홉이 되던 해 동원증권을 나왔다. 당시 동원증권 사장은 김정태 전 국민은행장이 맡고 있었다.

김 전 사장은 박 회장을 잡아두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지만 결국 그를 잡지 못했다. 그런데 그를 놓아 줬다는 이유로 화가 난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이 김 전 행장과 무려 6개월 동안 말도 하지 않고 지낸 일화는 아직도 금융권에서 회자하고 있다. 김 전 행장은 한신증권 이사로 일하면서 박 회장을 동원에 영입했던 주인공이기도 하다.

광주일고 출신 인사 중에는 “동문 중 지인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장병완”이라고 답하는 이가 많다. 그만큼 장병완 기획예산처 장관은 자타가 공인하는 ‘마당발’이다. 정부 부처뿐 아니라 정계·기업/금융계·예술계·의료계·법조계·언론계 등에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다.

▶왼쪽부터 박정삼 그랜드코리아레저 사장,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부회장,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선종구 하이마트 사장.

그런 그가 가장 친한 친구로 꼽는 인물은 송하중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 장 장관은 “하중이는 성품이 소탈하고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스타일이어서 친구들이 다 좋아한다”며 “머리도 좋고 운동도 잘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리에 있지만 좀처럼 잘난 체하지 않아 뚝배기 같은 맛을 느끼게 하는 놈”이라고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했다. 그가 있는 자리나 위치, 영향력 때문이 아니라 남다른 인간미가 그의 주변에 사람이 모이게 한다는 것이다.

장 장관과 송 위원장은 그야말로 막역한 사이다. 광주 서석초등학교에서부터 가장 친한 사이였고, 광주서중·광주일고를 함께 다녔다. 서울대에도 나란히 들어갔다. 장 장관은 무역학과에, 송 위원장은 금속공학과에 진학했다. 50년 지기인 둘은 지금도 사석에서는 이놈 저놈 하는 사이다.

장 장관은 광주일고에서도 눈에 띄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다부진 몸에 농구·축구 등 모든 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공부도 항상 톱 클래스였다. 이진순 전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이 그와 성적 게시판에서 항상 수위를 다투던 사이였다고 한다. 성격이 원만해 사귐의 폭도 넓었다. 5대째 국보급 화가를 배출한 남농 허백련의 장손자인 허달재 화백과 친했고, 황지우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도 고등학교 때부터 연락이 끊이지 않는 사이다. 6년 후배인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은 지금도 자주 만나는 후배 중 한 사람이다.

장병완 기획예산처 장관 ‘최고 마당발’

최근 광주일고 동문 사이에서는 정경태 르메이에르건설 회장의 승승장구가 화제다. 서울 신촌·사당·종로 등에 지은 빌딩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사업 확장에 나서고 있기 때문. 게다가 그는 동창회와 광주일고 출신 동문의 대소사를 잘 챙기기로 유명해 그의 성공은 광주일고 출신 동문을 흐뭇하게 하고 있다.

정 회장은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일고를 나왔다. 대학(동국대) 졸업 후 이것저것 손을 대다 성격에도 맞고 승부도 가장 빨리 나는 건설을 선택했다. 이때부터 분양판을 기웃대 1988년 서른일곱 살의 나이에 회사를 차렸다. 부동산개발 컨설팅 업체 ‘르메이에르’의 출발이었다. 분양에 재미가 붙은 그는 건물도 조그맣게 짓고 팔아보다 아예 건설회사까지 차려 버렸다. 회사가 커지는 속도만큼이나 투서도 빠르게 불어났다. 이 때문에 검찰 조사도 받았다.

“털어도 먼지가 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지만 마음고생도 심했다”는 그는 힘들 때마다 현대 창업주인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을 떠올린다고 했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사업 신조도 “작은 부자는 노력이 낳지만 큰 부자는 신용이 낳는다”는 정주영 회장의 철학에서 그대로 따왔다. 정주영 회장처럼 새벽 4시면 일어나는 새벽형 인간이기도 하다.

정 회장은 미국 헤리티지 재단 이사로 부시 대통령 일가와도 가깝다. 한국인으로는 드물게 부시 부자의 대통령 취임식에 모두 참석하기도 했다. 운동을 좋아해 미국 내 태권도 보급에도 적극 앞장섰다. 이 공을 기려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시는 매년 7월2일을 ‘정스데이(Chung’s Day)’로 정했는가 하면, 오크힐시는 ‘정스파크(Chung’s Park)’를 조성했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 ‘동문사랑’ 열성적

정 회장은 동문회 활동에도 누구보다 열성적이다. 2년여 전 광주일고 재경동창회가 변변한 사무실이 없어 고생하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사재를 털어 여의도 전경련 건물에 사무실을 마련해 줬다. 또 종로에 짓고 있는 빌딩이 내년에 완공되면 이곳에 아예 영구적으로 재경동창회의 보금자리를 마련해줄 예정이다. 광주일고 재경동창회 관계자는 “동창회나 학교에 무슨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연락이 오는 사람이 정 회장”이라고 말했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동문 사랑은 재계에도 정평이 나 있다. 박 회장은 광주일고 야구부가 서울에서 경기를 할 때면 직접 경기를 관람하는 것은 물론 선수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 때문인지 금호아시아나그룹에는 유난히 광주일고 출신이 많다. 주력기업 CEO와 임원 자리에는 어김없이 광주일고 출신이 포진해 있다.

▶왼쪽부터 손성원 LA한미은행장, 송기출 해태제과 부회장, 정경태 르메이에르건설 회장, 정태석 광주은행장.

이들 중 광주일고 출신들이 자수성가형으로 주저 없이 꼽는 인물이 있다. 2004년 입사 30년 만에 CEO 자리에 오른 오세철 금호타이어 사장이 주인공. 그는 지독한 가난을 딛고 국내 최고의 타이어 전문가이자 대기업 사장에까지 올랐다.

오 사장은 전남 나주군 다시면에서 4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 갑자기 가세가 기울면서 그의 인생은 20여 년간 고생의 연속이었다. 누나와 함께 광주에서 자취하던 광주서중 재학시절 그는 차비가 없어 학교까지 10리 길을 걸어다녔다.

우산이 없어 비가 오면 그대로 맞았고, 소풍이나 수학여행은 엄두도 못 냈다고 한다. 친구들이 형형색색의 과자와 사이다를 싸들고 떠난 텅 빈 교정에서 그는 화장실 청소를 해야 했다. 광주일고 시절 역시 마찬가지. 등록금은 담임 선생님이 대신 내 줬고,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자취방 얻을 돈마저 없어 인근 여자고등학교 뒷동산에 천막을 치고 살았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늘 상위권이던 그의 성적은 이 시기 조금씩 뒷걸음치기 시작했고, 결국 대학 입시에 낙방했다. 가난한 살림에 재수는 엄두도 내기 힘든 사치였지만 그래도 대학은 가야 했다.
오 사장은 재수 시절 1년 중 아홉 달은 돈을 벌고 3개월만 공부했다. 봄·가을에는 건설현장의 잡역부로 일하고, 여름에는 광주 시내를 돌아다니며 ‘아이스케키’를 팔았다. 그는 “1967년 겨울 전남대 화학공학과 합격증을 받아들고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고 했다.

오세철 금호타이어 사장 ‘자수성가형’ 손꼽혀

그를 궁핍에서 건져올린 것은 1974년 입사한 삼양타이어(현 금호타이어)였다. 금호그룹 창업주인 고(故) 박인천 회장이 1961년 광주지역에 설립한 대규모 타이어 공장이었다. 입사 성적은 33명의 공채시험 합격자 중 수석이었다.

“이제 저도 정기적으로 월급을 받는 직장에서 사람 구실을 하며 생활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너무 기뻤습니다.”

▶1929년 일제의 식민지교육에 항거한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광주학생운동 기념탑. 광주일고 교정에 있다.

첫 보직은 연구과 직원. 오랜 가난에 짓눌려 있던 그의 잠재력은 이때부터 폭발하기 시작했다. 입사 2년 만에 연구과장 직무대리로 수직상승했다. 밤낮없이 연구한 끝에 1977년 항공기 및 장갑차용 타이어를 국내 최초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펑크가 난 상태에서 시속 80km의 속도로 50km를 달릴 수 있는 특수 타이어는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지독한 가난을 겪어봤던 그는 생활고를 비관해 누가 자살했다는 뉴스를 봐도 남들처럼 “죽을 용기로 왜 열심히 살아볼 생각을 하지 못하나”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도를 넘어선 가난은 사람이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금융권에서 광주일고는 김대중 정부시절 큰 활약을 보였던 것에 비해 현정부 출범 이후 다소 위축되는 모습이다. 광주일고 출신은 2002년 당시에는 금융기관장급이 10명이나 됐지만 현재는 대폭 감소했다. 정기홍 서울보증보험 사장, 정태석 광주은행장 등이 겨우 명문 광주일고의 명맥을 잇고 있다.

그렇다고 금융권에서 광주일고의 위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정부나 정치권의 입김이 상대적으로 덜 작용하는 증권업계에서는 광주일고 출신이 여전히 맹활약하고 있다. 단일 고등학교 출신으로는 타학교에 비해 수적으로 유난히 많은데다 자타가 공인하는 내로라하는 쟁쟁한 실력가들이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증권업계 광주일고 인맥 가운데 ‘스타’급으로는 박현주 미래에셋증권 회장, 장인환 KTB자산운용 사장, 송상종 피데스투자자문 사장 등이 꼽힌다. ‘광주일고 출신 3인방’으로 불리는 이들은 모두 52회 동기생으로 지난 20여 년간 경쟁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증권·자산운용업계의 대표 스타로 성장해 왔다.

세 사람은 고등학교 시절에도 경쟁 대상이었다. 공부에서는 송 사장이 조금 앞섰다. 졸업 후 송 사장은 서울대 무역학과에, 장 사장은 서울대 사회학과에, 박 회장은 고려대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대학 졸업 후 송 사장은 은행원으로, 장 사장은 삼성그룹으로, 박 회장은 증권맨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이들은 1987~88년 약속이나 한 듯 차례로 동원증권으로 모였다.

증권업계 ‘광주일고 3인방’ 맹활약

동원증권 시절 ‘3인방’은 독보적 존재였다. 이들이 상품팀에 근무할 때는 증권업계 최고 상품을 제조해 히트시켰고, 영업부문에서 일할 때는 각종 기록을 모두 휩쓸다시피 했다. 당시 박 회장과 장 사장이 각각 동원증권 압구정지점장과 합정동지점장을 지낼 때 두 지점은 약정에서 전 증권사 지점을 통틀어 전국 1, 2위를 다툴 정도였다. 이들의 경쟁관계는 1997년 각자의 길을 선택해 업계 최고경영자로 성장하는 과정에서도 줄곧 이어졌다.

증권업계에서 광주일고 출신 인맥은 폭이 넓다. 전·현직 증권 및 자산운용사 사장, 유관기관 주요 인사로는 금융감독원 부원장보를 지낸 김영재 칸서스자산운용 회장(41회), 김대송 대신증권 부회장(42회), 강상백 전 금감원 부원장보(44회), 곽성신 증권선물거래소 코스닥시장본부장(44회), 김종관 한누리투자증권 사장(47회), 이병헌 피데스증권 사장(52회) 등이 대표적이다.

▶1.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역사관.
2. 광주일고는 야구명문으로도 이름을 떨쳐왔다.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김병현, 최희섭, 서재응 등이 광주일고 출신이다.
3. 광주일고 전경.

광주서중을 나온 후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했지만, 서중·광주일고 동문으로 분류되는 인물은 오호수 전 증권업협회 회장(37회), 이강원 전 굿모닝신한증권 사장(44회·현 한국투자공사 사장), 홍석주 한국증권금융 사장(46회) 등이 있다.

이들 광주일고 출신 증권인은 업계 발전을 이끌며 서로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 은행과 보험업계에 종사하는 동문까지 포함, 일금회(一金會)라는 친목단체를 만들어 분기별로 한 번씩 모임을 갖고 있다.

증권업계에 광주일고 출신이 유독 많은 것이 지역 소외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도 있다. 한 증권사 사장은 “과거 3~6공화국 시절 정권에서 소외받은 호남지역의 대표적 고등학교 출신으로는 은행 등 제1금융권에서 출세하기 힘들어 상대적으로 인기가 덜했던 제2금융권으로 대거 진출한 결과”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광주일고 졸업생 상당수가 법대 대신 의대로 진학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 운용사 사장은 “광주일고 출신의 특징은 도전과 모험정신이 강하다는 것”이라며 “증권·자산운용업계가 은행 등 다른 분야에 비해 역동적인 것이 일고 출신들의 특성과 맞아떨어진 점도 폭넓은 인맥을 형성한 이유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은행·보험 아우른 ‘일금회’ 끈끈한 연대 과시

금융권의 광주일고 인맥을 논할 때 손성원 LA한미은행장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올 초 <월스트리트저널>이 미국에서 가장 정확한 경제 전망을 내놓는 분석가 50인 중 1위로 선정해 화제를 모았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 1월 지난해 1∼9월 기준으로 미국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및 물가상승률 전망치와 실제 수치를 비교한 결과 손 행장이 실제 수치에 가장 근접한 전망을 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손 행장은 1962년 광주일고를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유학한 ‘조기유학생’이다. 당시 손에 쥔 돈은 100달러가 고작. “선진국의 경제학을 배워 지지리도 가난한 우리나라를 잘살게 해보자는 것이 조기유학을 결심한 배경이었다”고 한다.

플로리다주립대를 3년 만에 졸업하고 피츠버그대에서 2년 만에 박사과정을 밟을 때도 그의 꿈은 금방 이뤄지는 듯했다. 그러나 웬걸. 박사논문 지도교수였던 머리나 휘트먼이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경제보좌관으로 발탁되면서 한국으로 돌아오려던 그의 계획도 어긋나고 말았다. 논문 통과 막바지에 백악관으로 자리를 옮긴 휘트먼은 미안했던지 “논문이 완성되면 한 부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 후 논문을 받아본 그는 손 행장의 능력에 탄복해 “백악관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이래서 얻게 된 명함이 ‘백악관 경제자문회의 이코노미스트’다.

1973년부터 2년 동안 백악관에서 일하면서 그는 월가를 알게 됐고, 그린스펀 전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과 친분도 쌓았다.

손 행장은 1974년 노웨스트은행 부행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코노미스트 겸 은행원 생활을 시작한다. 백악관을 그만둘 무렵 데이비드 록펠러 전 체이스맨해튼은행 회장이 직접 노웨스트은행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를 추천했다고 한다.

아무리 조그만 은행이라고 하지만 29세인 신출내기 은행원한테 부행장 자리를 주는 것은 어쩌면 모험이었다. 그 후 그는 노웨스트은행이 웰스파고은행과 합병되면서 웰스파고은행 수석부행장 겸 수석이코노미스트로 자리를 옮긴다. 이 과정에서 그는 월가의 ‘족집게 이코노미스트’로 이름을 알렸다. 경제적으로 큰 사건이 발생할 경우 미국 언론이 가장 먼저 찾는 이코노미스트가 됐다. 한때는 그린스펀 전 FRB 의장이 금리를 바꿀 때 그의 의견을 구한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2001년에는 블룸버그통신이 선정한 ‘가장 정확한 경제예측가 5명’에 뽑히기도 했다.

손 행장은 지난해 1월 미국 내 교포은행 중 가장 큰 한미은행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은행장으로 일하면서도 별도의 경제전망 사이트(www.drsohn.com)를 운영하며 틈틈이 경제전망 세미나 등을 개최할 정도로 이코노미스트의 역할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광주일고는 어떤 학교?

항쟁의 역사 간직한 ‘광주학생독립운동’ 진원지

▶1. 1935년 촬영한 광주일고 전경
2. 1967년에 열린 광주학생헌장선포대회
3. 광주고등보통학교 시절의 교사

광주제일고등학교(광주일고)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다른 명문고에 비해 출발이 다소 늦었다. 그러나 광주일고의 역사는 다른 어떤 학교와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파란만장하다. 일제강점기 요즘 말로 동맹파업에 해당하는 세 차례의 맹휴가 일어났던 곳이 광주일고이며, 전국을 독립운동의 물결로 뒤덮었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도 바로 광주일고였다.

광주일고의 설립이 시작된 것은 3·1운동이 일어나던 해인 1919년 7월의 일이다. 현기봉·김형옥·유강렬 등 전남지역 유지들이 광주고등보통학교 설립을 위해 기성회를 조직하면서다. 학교가 문을 연 것은 이듬해인 1920년. 지금의 무등극장 자리인 광산관을 빌려 100여 명의 학생을 모집해 개교했다.

광주광역시 누문동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922년의 일이다.

새로 옮긴 자리에 제대로 터를 잡기도 전인 1923년 광주일고에서는 몇 년 후 전국을 항일의 물결로 뒤덮는 사건의 발단이 되는 항일동맹, 이른바 제1차 ‘맹휴운동’이 일어났다. 아직 1회 졸업생도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일어난 이 사건으로 인해 광주일고는 일제로부터 주목받으며 집중 감시 대상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일제의 갖은 압박 속에서도 광주일고는 제2차, 제3차 맹휴운동에도 빠지지 않고 참가했다. 그러다 1929년 마침내 광주학생독립운동이라고 불리는 큰 사건이 광주일고 학생들의 주도하에 일어났다.

1929년 11월3일은 일본 메이지(明治) 천황의 탄생 기념일인 명치절이었으나, 우리에게는 음력 10월3일 국조 단군이 개국하신 날이었다. 개천절에 신사참배를 강요당했던 광주고보생들은 명치절 행사에서 일본 국가의 제창에 묵비권을 행사하는 등 비통한 심경에 가해졌던 일본 학생들의 무례한 도전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광주에서의 항일시위에서 시작되었으나 광주지역에 그치지 않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시위나 동맹휴학으로 계속돼 전국적으로 194개 학교가 참가했고, 참가 학생 수는 5만4,000여 명으로 당시 전체 학생의 절반 이상이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일어섰다. 희생당한 학생은 퇴학 582명, 무기정학 2,330명, 검거 1,462명이나 되는 엄청난 숫자였다.

이로 인해 광주일고는 전국적으로 깨끗한 이름을 얻으면서 명문 고등학교로 성장하는 초석을 다졌다. 이후에도 광주일고는 단순히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모이는 학교가 아니라 지각 있는 우등생들의 산실로 이름을 떨쳐왔다.

정일환 월간중앙 기자 [wha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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