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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 7월 수상작] 내일의 꿈 잃지 않는 직장인을 그리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장원

시조 백일장

시조 백일장

천 원 앞에서
윤정욱

성대역 횡단보도 허기가 몰려온다
앞뒤로 뒤집힌 꿈 늘어져 기다릴 때
호떡집 벽돌에 기대 천 원이 익어간다

온종일 말단에 갇혀 눈빛 풀린 직장인
주머니 가벼운데 웃음까지 납작해져
내미는 지폐 한 장에 하루의 품 넓힌다

번개 같은 손놀림은 그늘을 달궈 놓고
힘겨웠을 빈속에 둥근달 안겨준다
어둠 끝 환하게 밝혀 오늘을 꿀꺽 삼킨다

◆윤정욱

윤정욱

윤정욱

한국방송통신대 국문과 2학년 재학

차상

칠월의 산(産)
오시내

앞산이 몸을 푼다 제 몸을 꾹꾹 짠다

새들마저 조용해 해산하는 칠월의 산(山)

한 계절 순산하는 일 붉은 물로 차올라

숨이 찬 오동나무 비지땀을 흘린다

절벽에 박힌 바위 뿌리를 지켜주며

산허리 휘도는 물살 산통은 길을 낸다

한 번 더 힘을 주면 장대비 쏟아지고

흔들리는 우듬지에 새잎이 탄생한다

우거진 숲속의 목청 골마다 우렁차다

차하

예감
김은희

잔설처럼 스며들던
열감기 어지럽다
오랜 밤 쌓아왔던
침묵이 부서지고
한 걸음
다가서 보면 두 걸음 멀어진다

건조한 자판 위에
가습기를 틀어봐도
여전히 잔기침처럼
헝클린 문장들
예감은
틀리지 않아 적중하는 글 감기

이달의 심사평

무더위와 장마가 계속되는 까닭인지 이달의 응모작이 그리 만족스러운 양과 질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눈여겨 봄직한 몇 작품들이 있어 기쁜 마음으로 심사에 임한 결과, 윤정욱의 ‘천 원 앞에서’를 이달의 장원으로 올린다.

퇴근길 고달픈 직장인의 허기를 달래주는 “호떡”에서 끌어낸 “뒤집힌 꿈”과 “웃음까지 납작”하다는 표현은 직장인의 고단함을 선명하게 이미지화하고 있다. 뒤집히고 납작해졌지만 오늘의 호떡은 “그늘을 달궈”서 빈속에 들이는 내일의 “둥근달”이 되는 것이다. 전통적 시조의 전개방식 안에서 긍정적인 위무로 내일의 꿈을 잃지 않는 직장인의 애환을 개성적으로 형상화한 힘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차상으로 오시내의 ‘칠월의 산(産)’을 선한다. 생명력 넘치는 7월을 유려하고도 역동적으로 풀어낸 솜씨가 엿보인다. 제목의 한자어 ‘산(産)’과 내용의 주 대상인 ‘산(山)’의 동음이의어 활용, “푼다” “짠다” “차올라” “쏟아지고”와 같은 활달한 시어들을 마지막의 “탄생”으로 완결 짓는 전개방식 또한 많은 습작이 그 바탕이 되었다는 믿음을 가지게 한다.

차하는 김은희의 ‘예감’이다. 창작의 지난함과 고통은 창작을 해 본 사람은 누구나 경험하며 이에 공감하고 있을 터. 시작(詩作)에 드는 과정을 섬세한 메타적 사유로 담아냈다.

많은 응모 작품들이 우리 전통 정서나 정한을 담고 있다. 시조는 그 형식이 옛것이지 거기에 담을 내용이 옛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시조에 쓴 ‘시(時)’의 의미를 거듭 새겨보면서 ‘지금 여기’의 현대성을 시조라는 정형의 집에 미학적으로 앉히는 것이 현대시조라는 점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심사위원 강현덕·서숙희(대표집필)

초대시조

노을 서신
-나의 나타샤에게
성국희

엎질러진 와인 잔에 젖어드는 편지지
화들짝 닦으려다 그만 멈칫 손을 떼요
휘리릭 마법에 걸린 썰물의 그라데이션

잉크가 번져가자 내 안부에 꽃이 펴요
짙은 향기 뿜어내며 말없이도 절절하게
언어에 숨긴 씨앗을 들키고만 저물녘

그 어떤 문장 있어 이보다 애틋할까요
물결의 행낭 안에 띄워 보낸 편지 한 통
내 사람 나의 별이여, 서녘 창을 여세요

◆성국희

성국희

성국희

1977년 경북 김천 출생. 2011년 서울신문, 농민신문 신춘문예 등단. 제6회 백수 정완영 전국 시조 백일장 장원. 제5회 천강문학상 시조부문 우수상 수상. 2016년 이영도시조문학상 신인상 수상. 시조집 『꽃의 문장』 『미쳐야 꽃이 핀다』 등. 한결 동인, 국제시조협회,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

깊고 쓸쓸한 서녘의 문장을 읽는다. 하늘가에 드리워진 저물녘 노을은 세상의 비의(悲意)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편지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아직 펼쳐 읽지 못한 문장가들의 문장이 만수위로 흘러넘치며 내가 헛되이 버린 날들이 모두 모여 나를 향해 글썽이는 것 같다.

시인은 하늘이 그려놓은 단조의 악보에 시나브로 번지고 스며들어 노을빛 언어로 서간체 형식의 시를 지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를 향해 가는가. 떠도는 마음을 수습하여 고요에 드는 일몰 무렵, 오늘도 무사히 잘 살아냈다고 잘 건너왔다고 노을이 가만히 말을 건넨다.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견뎠는지 백아와 종자기처럼 “말없이도 절절하게” 노을은 다정하게 위로를 건넨다.

마음껏 울어도 우는 걸 들켜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은 노을이 피는 시간을 “언어에 숨긴 씨앗을 들키고만 저물녘”이라고 시인은 읊었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내 사람 나의 별이여, 서녘 창을 여세요”라고 노래한다. 독백처럼 혹은 연서처럼 행간이 붉다. 그 행간에 시인의 마음이 눈물처럼 번져있다.

시의 부제로 쓴 ‘나의 나타샤에게’는 전설의 시인 백석을 떠올리게 한다. 백석의 정인이었던 자야는 “1000억원 재산이 그 사람 시 한 줄만도 못하다”라고 했다. ‘노을 서신’에는 시조를 향한 시인의 뜨거운 열정이 행간마다 절절하다.

정혜숙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까지 중앙 시조의 e메일(j.sijo@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 할 수 있습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3편 이상,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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