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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아니면 말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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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장원석 기자 중앙일보 기자
장원석 증권부 기자

장원석 증권부 기자

영화 ‘더 헌트’의 주인공 루카스는 친구의 유치원생 딸 클라라가 뽀뽀를 하자 “그건 엄마, 아빠와만 해야 한다”고 타이른다. 하지만 상처받은 클라라는 루카스가 성기를 보여줬다고 거짓말을 한다. 루카스는 추악한 아동 성범죄자로 전락하고, 동네 사람은 물론 오랜 친구들마저 등을 돌린다. 그의 삶이 완전히 망가지고 나서야 진실이 밝혀진다.

5년 전 한 맘카페엔 김포의 어린이집 교사가 아이를 밀쳤다는 글이 올라왔다. 해당 원생의 이모가 학대를 단정하는 글을 재차 올리면서 사태는 확산했다. 교사 신상이 순식간에 퍼졌고, 감당하기 힘든 비난이 쏟아졌다. 폭행까지 당한 교사는 이틀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사 결과 학대는 없었다. 시발점이 된 이모의 글엔 이런 부분이 있다. “봤느냐고요? 아니요. 10여 명의 사람에게 들었습니다.”

혼자 생각한 걸, 그저 들은 걸 진짜처럼 말하는 세상이다. 웃고 넘길 수만은 없는 게 때때로 그 결과가 심각해서다. 최근 한기호 의원이 치른 고초가 그렇다. 그는 한 초등학교 교사의 안타까운 죽음에 연루됐다는 의심을 받았다. “인터넷에 도는 이야기를 모아서 쓴 건데 이리 퍼질 줄이야”라며 올린 거짓 글은 단 몇 시간 만에 그를 가해자로 만들어버렸다. 힘깨나 쓴다는 국회의원도 거짓의 폭풍 앞에선 힘없는 피해자일 뿐이었다. 진실만큼 거짓도 힘이 세다.

그래서일까. 그 힘을 이용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는다. 야당의 한 청년 정치인은 김건희 여사가 든 에코백 속에 ‘샤넬 파우치’가 담겨 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사흘 뒤 글은 삭제했으나 사과는 없었다. 한 의원 사건을 두고 김어준은 “국민의힘 3선인데 전혀 보도가 없다. 대단한 파장이 있을 사안”이라고 말했다. 엄청난 비밀이 숨어 있다는 뉘앙스다. 이내 틀렸다는 걸 알았지만 역시 사과는 없었다.

결과를 예상하지 못한 클라라와 달리 이들의 거짓말엔 상대방이 법적·도덕적 책임의 대상이 되길 바라는 분명한 저의가 있다. 더 악의적이다. 정작 본인들은 ‘아니면 말고’ 뒤에 숨어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다. 그러니 반복 또 반복이다. 의도했든 아니든 거짓이 쌓이면 불신의 총량도 증가하고, 신뢰가 무너진 사회는 위험천만하다. ‘아니면 말고’의 싹을 서둘러 잘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