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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프리즘] 골때녀에서 박은선까지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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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9호 30면

정영재 문화스포츠 에디터

정영재 문화스포츠 에디터

‘여자들이 데이트하면서 듣기 싫어하는 말? 첫째 남친의 군대 얘기, 둘째 축구 얘기. 최악은?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

요즘에도 이런 농담이 유효한지 모르겠다. ‘남친보다 축구’를 외치는 여성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2030 여성들 사이에서 축구가 힙한 취미로 급부상하고 있다.

2030 여성, 실전축구 매력에 빠져
월드컵 대표팀 ‘매운맛’ 보여주길

G마켓에 따르면 올 상반기 여성 고객의 축구용품 구매액수가 전년 대비 37%나 증가해 남성 증가율(18%)을 두 배 이상 앞질렀다. 무신사의 스포츠 전문관 ‘무신사 플레이어’의 1분기 여성 고객 거래액도 전년 대비 4배나 뛰었는데, 그 중에서도 축구·풋살에 특화한 브랜드인 ‘FCMM풋볼’ 제품의 여성 구매 비중이 41%에 달했다고 한다. 각 대학에 여자축구 동아리가 속속 생겨나고 있고 지역 중심의 일반인 클럽도 하루가 다르게 숫자가 늘고 있다.

축구와 풋살(미니축구) 플랫폼이 활성화하면서 ‘혼풋’도 확장 추세다. 혼풋은 혼자 축구하는 게 아니라 플랫폼에 등록한 회원끼리 팀을 구성해 운동하는 것을 말한다. ‘플랩풋볼’ ‘풋스타’ 같은 플랫폼에서는 회원이 원하는 시간·장소·수준에 맞춰 팀을 짜 주고, 경기와 트레이닝을 함께할 수 있도록 해 준다.

2030 여성에게 축구는 단순한 스포츠 이상이다. 뭔가에 열중하며 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모습을 드러내는 증거, 몸과 마음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패션 아이템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쁜 축구화를 신은 발, 팀 시그니처 포즈로 찍은 단체사진 등을 SNS에 올린다. 서로서로 경기 모습을 담은 영상을 찍어 교환하고 업로드한다.

2030 여성을 축구장으로 이끈 큰 공신은 SBS 예능 ‘골 때리는 그녀들’이다.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시작한 이 프로는 2021년 6월에 정규 편성됐고 시즌4까지 방영됐다. 축구를 해본 적이 없는 여성 연예인과 셀럽이 팀을 이뤄 풋살 경기를 한다는 단순한 플롯이다. 그런데 그녀들, 축구에 진심이다. 넘어지고 깨지고 다치면서도 악착같이 볼을 쫓고, 이겨도 져도 눈물을 펑펑 쏟는다. 그러면서 기술이 일취월장하고 팀워크도 착착 맞아나간다. ‘간만에 서사 탄탄하고 감동에 재미까지 갖춘 예능이 나왔다’는 호평 속에 ‘나도 축구 하고 싶다’는 여성 시청자의 욕망을 이끌어냈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게 2022년 12월 카타르 월드컵이다. 강호 포르투갈을 꺾고 극적으로 16강에 진출하는 드라마를 썼는데, 그 주인공들이 손흥민(31), 황희찬·김민재(이상 27), 조규성(25), 이강인(22)이다. 작은오빠나 친구, 심지어 남동생 또래인 잘 생기고 스타일 좋은 청춘이다. 이들이 착용한 축구화와 유니폼을 갖추고 나도 축구를 한다는 건 뿌듯한 일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여성이 제대로 축구를 한 건 언제부터일까. 불과 30여년 전이다. 내가 축구 기자를 시작한 1999년에도 여자대표팀이 남자 중1 선수들과 연습경기를 하면 대여섯 골 차로 졌다. ‘여자가 축구 한다’는 건 뭔가 부자연스럽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 어색함을 깨고 ‘여자축구’가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각인된 계기가 2003년 미국 월드컵 출전이었다.

당시 팀 막내로 뛰었던 박은선은 20년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2023 호주-뉴질랜드 여자 월드컵 무대에 선다. ‘성별 시비’로 힘든 시간을 보냈던 박은선은 “세 번째 월드컵인데 이번에는 꼭 골을 넣고 싶다. 경기에 못 나가도 누구보다 열심히 벤치에서 응원하겠다. 16강에 오르면 그 뒤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동성(同性) 셀럽과 남자 선수들의 모습을 보며 축구의 매력에 빠진 2030 여성들. 이번에는 대한민국 여성이 제대로 축구를 하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월드컵 대표팀이 보여주길 기대하고 있다. 한국의 첫 경기인 콜롬비아전은 7월 25일 오전 11시(한국시간)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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