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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정치가 ‘팬텀싱어’의 감동을 선사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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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조기숙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

조기숙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

TV 음악 프로그램 JTBC ‘팬텀싱어’시리즈가 시작한 2016년 이후 7년이 흐른 올해 ‘팬텀싱어4’를 최근 최종회까지 모두 시청했다. 남성 사중창단의 하모니를 들으며 형언할 수 없이 감동했다. 국민평가단과 함께 눈물 흘리며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정치는 왜 국민에게 이런 감동을 주지 못할까.”

한국의 정치 만족도는 지난 2000년 25%로 아시아 꼴찌였지만, 2006년엔 75%로 급등했다는 한 조사가 있었다. 그만큼 괄목할만한 정치발전을 이룬 경험이 있지만, 그 후 줄곧 후퇴해 오늘날 극단적 양극화에 빠졌다. 진영의 깃발은 거세게 나부끼지만, 총선을 9개월가량 앞둔 요즘 유권자의 40%는 찍을 정당이 없다고 한탄한다.

눈물 흘리며 지켜본 TV 음악경연
진영에 빠진 한국정치에 자극제
정치인 경연 프로 만들면 어떨지

필자가 논평가로 데뷔한 2000년대 초만 해도 정치 양극화가 이렇게 심하진 않았다. 정치인은 정당을 대변했지만, 4~6명으로 구성된 TV토론에서 적어도 2명 이상은 당파와 무관하게 전문가적 식견으로 양당 사이에서 심판관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요즘은 아예 토론이 실종되다시피 했고,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는다. 진실인지 아닌지도 모를 일방적 주장이 유튜브를 가득 채운다. 양극단이 강화될수록 합리적 유권자들은 양당을 외면하고 정치 불신은 깊어진다.

우리 정치가 후퇴한 가장 큰 이유는 합리적 담론 형성의 장이 사라진 데 있다. ‘팬텀싱어’와 바람직한 정치는 한 가지 유사점이 있다. 어제의 경쟁자가 내일의 팀원이 된다는 점이다. ‘팬텀싱어’ 참가자들은 상대 팀보다 더 잘하기 위해 선의의 경쟁을 하는데 왜 정치인들은 상대를 적대시하고 악마화할까. 정치판은 ‘팬텀싱어’ 프로그램의 몇 가지 우수한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첫째, ‘팬텀싱어’에 출연한 경연자는 물론 시청자도 경연 과정에서 전문가의 즉각적이고 투명한 피드백을 받는다. 엄청난 학습을 통해 같이 발전한다. 하지만 정당은 민주주의 학습이 부족한 권리당원의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흑백논리에 경도되고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린다.

둘째, ‘팬텀싱어’에서는 대학생과 기성 음악가가 평등하고 투명하게 실력으로 경쟁한다. 하지만 정당 공천은 권력자와의 친소 관계나 진영 논리의 포로가 된 권리당원이 좌우한다.

셋째, ‘팬텀싱어’는 각 팀의 하모니와 새로운 시도가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정치에선 청년들의 새로운 시도나 창의성이 억압된다. 가상의 적을 만들어 죽기 살기로 싸우고 무책임한 선동가들이 더 많은 표를 얻는다.

‘팬텀싱어’의 평가 기준과 방식을 그대로 차용해 새로운 토론·심의 경연 TV 프로그램이 탄생하면 좋겠다. 민주주의를 제대로 학습하고 그만큼 우리 정치도 성숙해질 수 있을 것이다. 새 토론 프로그램은 ‘팬텀싱어’처럼 여러 명의 심사위원과 참가자 1명이 토론하는 예심을 통해 선발한다. 사회적 갈등 쟁점과 정책에 대한 주제를 주고 일정 기간 준비한 뒤 1대1 토론, 2대2 토론, 3대3 토론에서 살아남은 최종 12명이 세 개의 파이널 팀을 만들어 경쟁하게 된다.

각 팀의 최종 멤버 4명은 반대 입장에서 2대2 토론을 하되 서로 다양한 대안을 검토하는 심의 과정을 통해 4명이 협력한 단일 해법을 제시한다. 세 팀은 서로 다른 정책 대안을 갖고 토론하되, 심사위원과 국민평가단이 최종적으로 가장 훌륭한 결과를 도출한 팀을 선택한다. 꼼꼼한 심의를 거친 합리적 대안은 실제 정책에 반영될 수도 있고, 여기에서 훈련받고 선발된 참가자들은 정치인에게 꼭 필요한 의사소통과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결국 이 프로그램은 공정하고 투명한 정치의 등용문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훈련을 거쳐 탄생한 정치인들은 생각과 이념이 다른 상대와도 협력·타협해 국민께 감동을 주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란 사실을 배운다. 지켜본 국민도 심의 과정과 협력을 통해 흑백논리가 얼마나 단세포적이고 사회를 병들게 하는지 학습한다.

이렇게 키워진 정치인들은 정파를 뛰어넘어 우정을 쌓고, 국가와 국민의 미래를 위해 공동의 어젠다를 만들고, 해법을 제시하는 선진국 정치를 실천하게 된다. 현역 국회의원들의 참여도 환영한다. 합리적인 담론 형성의 주체인 언론사들이 민주주의 학습의 장을 제공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 주기를  기대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조기숙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