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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성탁의 시선

잦아진 ‘직을 걸겠다’ 해석하면 ‘총선 출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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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성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성탁 논설위원

김성탁 논설위원

최근 정부 장관들 사이에서 “직을 걸겠다”는 말이 자주 나오고 있다. 무엇인가 걸겠다는 용어는 대개 도박에서 쓰인다. 영화를 보면 가진 돈을 한판에 전부 거는 ‘올인’ 장면이 나오고, 땅문서나 건물을 걸거나 심지어 자신이 경영하는 회사까지 거론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도박판에서나 나올 법한 용어를 국정 운영을 책임지는 고위직 인사들이 쓰니 당황스럽다.

지난 6일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더불어민주당이 최근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소위에서 단독 처리한 ‘민주유공자 예우법’을 반대하며 “해당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다면 제가 보훈부 장관을 그만두더라도 (윤석열 대통령에게) 거부권을 건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그는 백선엽 장군을 친일파로 보는 시각을 비판하며 “제 직을 걸고 이야기할 자신이 있다”라고 했다. 법안에 문제가 있으면 관련 부처 장관으로서 국민에 이유를 상세히 설명해 여론의 판단에 도움을 주고, 국난 극복에 공헌한 백 장군에 대해서도 정확한 사실부터 알리는 게 순서다. 그런데 자꾸 장관 자리를 걸겠다고 나선다.

원희룡·박민식 장관 등 잇딴 발언
공직은 주권자 국민이 맡긴 자리
출마 겨냥 선명성 과시용 아닌가

원희룡 국토부 장관도 최근 양평 고속도로 종점 변경 논란이 불거지자 “제가 김건희 여사 (일가의) 땅이 거기 있었다는 것을 이 사건이 불거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인지하는 게 있었다면 (중략) 저는 장관직을 걸 뿐 아니라 정치 생명을 걸겠다”고 했다. 원 장관은 지난해 8월에도 정부 1기 신도시 재정비 ‘공약 파기’ 논란이 일자 “국토부로 인해 재정비 일정이 지연되거나 지체되는 일이 없도록 장관직을 걸고 약속한다”고 말했었다.

현 정부 들어 장관직을 거는 발언으로 단연 주목을 받은 이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다. 지난해 10월 김의겸 민주당 의원이 국회에서 이른바 ‘청담동 술자리설’을 제기하자 “제가 거기 있었다는 근거를 제시하라. 저는 직을 포함해 다 걸겠다. 의원님은 뭘 거시겠냐”고 항의했다. 해당 의혹이 실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난 만큼 한 장관이 느꼈을 억울함은 가늠할 만하다. 하지만 이미 차기 대선 주자로 분류되는 그가 직을 걸겠다는 용어를 꺼낸 이후 부쩍 유사 발언이 잦아지는 느낌이다. 같은 검찰 출신인 이복현 금융감독원장도 소시에테제네랄(SG) 증권발 주가 폭락 사태가 우려되자 “시장 교란 세력들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다. 과하게 말씀드리면 거취를 걸다시피 한 그런 책임감을 갖고 추진해갈 것”이라고 말했다.

직을 건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감을 갖고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강조하기 위한 수사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세는 장관이라면 직을 걸지 않아도 당연히 갖춰야 할 덕목이다. 국회 과반 의석을 가진 거대 야당의 반대에 묶여 법안 하나 제대로 통과시킬 수 없고, 각종 공세를 막아내려다 보니 강한 표현이 나왔을 수도 있다. 당사자들로서는 과거 대통령이나 대선 후보도 그런 말을 했는데 뭐가 문제냐고 여길지 모르겠다.

실제로 2003년 대선자금 문제가 달아오르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우리 캠프에서 쓴 불법 대선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만 넘으면 대통령직을 사퇴하고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말했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대선 후보 시절 “BBK와 관련이 있다면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대통령직을 걸고 책임을 지겠다”고 했었다. 심지어 이완구 전 국무총리는 2015년 ‘성완종 리스트’ 수사와 관련해 돈을 받은 증거가 나오면 목숨을 내놓겠다고 ‘생명’까지 담보로 건 적이 있다. 가능하지도 않은 이런 언급 역시 정치인들이 결백을 주장하면서 공세를 차단하려고 전략적으로 쓰는 것일 뿐이다.

정부 고위직들이 정말 책임감을 느낀다면 직을 건다고 할 게 아니라 성과를 보여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임명권자에게 사의를 표하고 평가를 받으면 될 일이다. 더욱이 도박에서 거는 것은 개인 소유물이어야 한다. 하지만 정치인이나 장관 등의 공직은 주권자인 국민이 위임해 준 것이다.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이들이 마치 자기 것처럼 거네 마네 할 사안이 아니다.

선명성을 드러내는 이런 표현은 진영으로 갈라진 한국 정치에서 자기편에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래서 유행처럼 번지는 강성 발언을 두고선 “빨리 나가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선거운동하려고”(박지원 전 국정원장)라는 풀이까지 나왔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출마 희망 인사들의 경우 공직을 사퇴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정책 추진에 직까지 걸며 각오를 다진 이들이 총선 출마를 위해 직을 던지면 이율배반 아닌가?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