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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만의 대면 시조축제, 폭우에도 학생 200명 모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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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중앙학생시조백일장이 코로나19로 인해 4년 만에 대면 행사로 치러졌다. 15일 서울 조계사에서 열린 제9회 중앙학생시조백일장에 참가한 학생들이 작품 에 열중하는 모습.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중앙학생시조백일장이 코로나19로 인해 4년 만에 대면 행사로 치러졌다. 15일 서울 조계사에서 열린 제9회 중앙학생시조백일장에 참가한 학생들이 작품 에 열중하는 모습.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거침없이 쓰세요. 각자 상상력을 발휘해서 생각과 느낌을 생생하게 표현해 보세요. 새로우면서도 놀라움이 깃든 작품이 탄생하길 기대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4년 만에 대면 행사로 열린 중앙학생시조백일장.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정환 이사장은 전국에서 올라온 초·중·고 학생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개회사를 겸한 기조강연에서다. 시조의 규칙을 알기 쉽게 설명하면서도, “거침없이 쓰라”고 거듭 강조했다. 15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열린 제9회 중앙학생시조백일장, 제6회 중앙학생시조암송경연대회의 풍경이다.

잇따라 비 피해 소식이 전해진 하루였지만 전국에서 모두 217명의 학생이 참여했다. 멀리 부산·여수 등지에서 KTX 새벽 열차를 타고 올라온 학생도 있었다. 좌석이 부족해 일부 학부모는 개회식이 열리는 동안 뒤편에 서서 지켜봐야 했다.

올해 백일장과 암송대회에는 전국의 114개 초·중·고에서 605명이 응모했다. 이 가운데 본심에 진출한 360명의 절반이 넘는 학생들이 이날 백일장에 참가한 것이다.

왼쪽부터 김연석 교육부 책임교육정책관, 우수교사상 받은 추수진 교사, 암송 대상 받은 초등부 서가현, 백일장 대상 받은 중등부 김예지, 이정환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 최훈 중앙일보 주필.

왼쪽부터 김연석 교육부 책임교육정책관, 우수교사상 받은 추수진 교사, 암송 대상 받은 초등부 서가현, 백일장 대상 받은 중등부 김예지, 이정환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 최훈 중앙일보 주필.

오전 11시 백일장이 시작됐다. 이정환 이사장의 간략한 강연에 이어 시조시인협회 정용국 감사가 백일장 시제(試題)를 발표했다. 초등부는 ‘나의 꿈’과 ‘약속’, 중등부는 ‘벌’과 ‘지구’, 고등부는 ‘오늘’과 ‘소금’이었다. 점심시간 직후 바이올린 연주자 이재훈씨가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 크라이슬러의 ‘아름다운 로즈마린’ 등을 연주했다.

이어진 시조암송대회.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시조시인협회가 선정해 사전에 공개한 시조 50편 가운데 무작위로 세 편씩을 외우는 예심, 두 편씩을 외우는 본심으로 나눠 진행됐다. 장려상을 받은 진주 주약초등학교 1학년 김지명양의 암송이 이날 경연의 하이라이트였다. 말할 때 발음이 분명치 않을 정도로 앳된 김양은 예심·본심의 시조 다섯 편을 한 글자로 틀리지 않고 암송해 탄성을 자아냈다.

오후 4시, 교육부장관상인 대상 시상에 나선 교육부 김연석 책임교육정책관은 “아이들이 디지털 기기에 너무 빠져있다고 걱정하는 학부모들이 많은데, 시조를 쓰기 위해 여기 모인 학생들의 마음이 감사하고 소중하다”고 했다. 중앙일보 최훈 주필은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단테의 서사시 신곡을 외우다시피 할 만큼 읽었다”며 “깨우침의 원천인 문학에 빠져 본 경험은 뛰어난 창조력의 샘이 될 것”이라고 했다.

초등부 대상 서정윤 (여수 여도초3)

약속

엄마의 마음속을 아프게 안하겠다
엄마와 약속했다 머릿속 약속했다
점점점 사라져간다 사라지는 약속들

엄마의 또 잔소리 엄마가 말씀한다
어젯밤 엄마와 너 약속을 했었잖아
내 입은 오리입되곤 방을 향해 걸어가네

엄마도 자기 아들 우는거 보고서는
속상해 눈물뚝뚝 약속은 사라지네
나는야 엄마께 가서 미안해요 어머님

잠시후 어머님도 나보곤 미안하다
속도 다시 짓고 어기지 말자한다
그리고 캥거루처럼 엄마 품에 안기네

“시 쓰다 시조도 쓰게 돼…짧아도 이해 잘 돼 신기”

서정윤

서정윤

전남 여수 여도초등학교 3학년 서정윤(9) 군은 “시조의 형식을 지키는 데 가장 큰 공을 들였다”고 했다. 역시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글자 수를 엄격하게 맞춰 써야 하는 점이 어려웠다”는 것이다.

서군이 제출한 백일장 답안지에는 작품 구절마다 서 군이 계산한 초·중·종장 글자 수가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고민의 흔적이다. 심사위원들은 “네 수 연시조가 연속성을 갖고 있으면서 시조 형식에 잘 맞아떨어졌다”고 평했다.

서군은 시조보다 시를 먼저 접했다고 한다. 장래 희망 리스트에 축구 선수, 과학자에 이어 시인도 포함돼 있다.

학교 선생님의 추천으로 시조 백일장에 참가하게 됐다는 서군은 “지난달에만 시조를 일곱 편을 쓰며 준비했다”며 “시조는 시보다 어렵지만, 이런 큰 상을 받아 너무 뿌듯하다. 앞으로도 계속 쓰고 싶다”고 했다. 서군은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고 덧붙였다.

중등부 대상 김예지 (채러티크리스천중3)

지구

구름으로 가득찬 하이얀 캉캉치마
몸통을 살짝 기운 아름다운 포즈들
지구는 매일매일을 한바퀴씩 연습한다.

반바퀴 휙 돌리면, 아침을 선물하고
반바퀴 돌아서면, 달빛이 반짝인다.
지구는 가장 느리지만 최고의 발레리나

“격식따라 맞춰 쓰는 시조…절제미 있어 더 재미있어”

김예지

김예지

“시조는 절제가 매력인 것 같아요.”

백일장 준비를 하며 처음 시조를 접했다는 채러티크리스천중학교 3학년 김예지(15)양은 시조의 매력에 대해 이렇게 간명하게 답했다.

대회 일주일 전 시조를 처음 써봤다는 데도 큰 상을 받았다며 “예상하지 못해 얼떨떨하다”고 했다. “시조는 격식에 맞춰 써야 하는데도 절제미를 느낄 수 있어 읽고 쓰면서 재미있었다”고 했다.

김양은 “시제(試題)로 ‘지구’가 제시되는 순간 조금 당황했지만, 지구가 365일 돈다는 특성을 떠올렸다”면서 “그 모습이 발레리나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중등부 심사를 한 정용욱·이송희 시조시인은 “지구를 발레리나로 의인화한 점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장래 희망을 묻자 김양은 “솔직히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면서도 “은퇴 후엔 시인으로 활동하고 싶다”는 뜻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고등부 대상 김하은 (춘천여고3)

오늘

청년의 눈동자에 스며드는 여름밤
가판대 사이사이 진열된 졸음들이
오늘도 재고로 남아 쌓여가는 중이다

손님이 없을 때면 문제집 펼쳐 놓고
창가에 번져오는 달빛을 말벗 삼아
내일을 외우곤 했다 흔들리는 여름밤

상품을 집어 들어 바코드 찍을 때면
청년의 이마에는 오늘이 새겨졌다
청춘의 최저시급은 얼마부터 시작일까

발걸음 끊어지고 골목도 잠드는 밤
졸린 눈 비비면서 끄적이는 오늘의 꿈
오늘도 편의점 속 청년은 새벽별로 빛난다

“글자 수 맞추는 과정에서 좋은 단어 떠오를 때 짜릿”

김하은

김하은

춘천여고 3학년 김하은(18)양은 수상작의 아이디어를 세 살 위 친언니의 경험에서 얻었다고 했다.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는 언니가 시간이 날 때마다 학교 공부를 틈틈이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제시어 ‘오늘’을 보고, 언니의 이야기가 떠올랐다”는 것이다. “청년이 오늘뿐 아니라 내일도 꿈을 키워나갔으면 하는 바람을 시조에 담았다”고 설명했다. 그의 작품은 “신춘문예 최종심에 올라도 손색이 없다”는 심사평을 받았다.

김양은 “그간의 노력이 결과로 이어진 것 같아 뿌듯하다”고 했다. 김 양은 8살 때부터 시쓰기를 시작했다. 꾸준히 공모전에 지원해 크고 작은 상을 받았다. 시조백일장은 이번이 두 번째다. 올해 대학 입시에서 문예창작과에 지원할 계획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좋은 단어들이 튀어나올 때 짜릿함을 느낀다”고 했다.

암송경연 대상 서가현 (진주 주약초5)

서가현

서가현

외조부 최영효 시인이 스승…“목소리 높낮이까지 조절”

서가현(11)양은 외할아버지인 최영효 시인에게 시조를 배웠다. 평소 암기에 자신이 있다는 그는 “6월 중순까지 시조 50개를 모두 외운 다음 이후 한 달간 매일 실전처럼 엄마와 테스트를 했다”고 말했다. 서양은 1학년 때 대구에서 열린 시조 암송 대회에서도 1등 상을 받았다. “암기를 빨리해도 금방 잊어버리기 때문에 반복해서 외웠다. 그러다 보니 차츰 기억나지 않는 일이 없어졌다”며 “외할아버지가 시조를 읽을 때 어떤 부분을 강조해서 읽어야 하는지, 목소리의 높낮이는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알려주신 점도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우수교사상 추수진 (채러티크리스천스쿨) 

추수진

추수진

지도학생 24명 전원 본심에…“종장 운율 신경 써라 당부”

경기도 양주시 채러티크리스천스쿨의 추수진 교사는 24명의 작품을 예심에 출품했고 24명 전원이 본선에 진출했다. 16년 차 교사로 국어를 가르치는 그는 “시조를 어려워하던 아이들이 어떤 단어를 고를지 골똘히 생각하며 시조를 쓰는 모습을 보일 때 뿌듯했다”며 “시조 형식에 맞게, 운율에 맞게 쓰도록 지도했고 특히 종장 운율을 신경 쓰도록 가르쳤다”고 말했다. “시를 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의 마음으로 주변의 대상을 보고 느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름다운 마음으로 세상을 볼 때 아름다운 시가 나온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심사평

어린이다운 천진함, 자연 사랑하는 마음 돋보여

◆초등부=‘약속’과 ‘나의 꿈’이라는 시제를, 어린이다운 천진함으로 표현한 학생이 많았다. 대상 수상자 서정윤의 ‘약속’은 흐트러짐 없는 호흡으로 문장을 밀고 나가는 힘이 돋보였다. 초등학교 3학년 학생으로서 높은 성취를 이뤘다.

심사위원: 김양희·하순희

◆중등부=시제 ‘벌’과 ‘지구’를 통해 인간이 파괴한 자연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담고자 노력한 흔적이 여러 작품에서 보였다. 그중에서 지구를 발레리나로 의인화하고 상상의 옷을 입힌 김예지 학생(대상)에 높은 점수를 줬다.

심사위원: 이송희·정용국

◆고등부=고등부 시제는 ‘오늘’과 ‘소금’이었는데, 시조의 율격적 요소를 잘 살리면서 삶의 형상을 잘 응축한 작품을 선별했다. 대상을 받은 김하은의 ‘오늘’은 청년의 고투와 성장을 향한 의지를 잘 그려냈다. 초·중·종장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도 구체적인 생활의 이미지가 선명했다.

심사위원: 염창권·우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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