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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컷칼럼

십원빵과 십엔빵, 같은 빵 다른 운명

중앙일보

입력

주정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얼마 전 서울 종로구 광장시장을 다녀왔다. 청계천 쪽에서 시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특이한 빵을 팔고 있었다. 경북 경주에서 인기를 끌다가 서울에도 진출했다는 십원빵이었다. 둥그런 빵의 앞면에는 경주의 대표적 문화재인 불국사 다보탑 모양이 선명했다. 빵의 뒷면에는 10이라는 숫자와 함께 1966이란 연도 표시가 있었다. 한국은행이 처음으로 10원짜리 동전을 발행한 1966년을 가리킨다.

동전 모양 빵, 우리가 원조인데
일본은 허용, 한국은 중단 위기
한은, 규제 만능 발상 바꿔가야

 지금은 보기 드문 옛 동전 모양의 빵을 만나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어린 시절 10원짜리 동전을 들고 뻥튀기나 번데기 같은 간식을 사 먹던 추억도 떠올랐다. 광장시장 십원빵의 가격은 3000원. 고객 눈앞에서 빵틀에 반죽을 붓고 치즈를 넣어주는 걸 보니 제법 먹음직스러웠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길 위의 셰프들’)로 해외에도 알려진 광장시장은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명소다. 경주나 광장시장을 방문한 외국인에겐 전 세계에서 오직 한국에만 있는 십원빵이 특별한 추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십원빵을 앞으로 볼 수 없게 될지 모른다. 동전 디자인 저작권을 가진 한은이 제동을 걸고 나섰기 때문이다. 한은은 지난달 21일 보도참고자료에서 “(십원빵 같이) 영리 목적으로 화폐 도안을 사용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쉽게 풀면 돈 받고 파는 상품에 화폐 디자인을 쓰면 안 된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십원빵의 디자인 변경 방안을 협의 중이란 설명을 덧붙였다. 현재의 디자인으로는 십원빵을 팔지 못하게 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십원빵의 사연은 일본 언론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일본 남서쪽 후쿠오카에 본사를 둔 니시닛폰(西日本)신문이다. 이 신문은 이달 초 ‘십원빵 생산중지 위기’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이 기사에선 “십원빵은 외국인 관광객에게도 인기가 있는 상품인데 파문이 커지고 있다”며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대선 때 (경주에서) 십원빵을 먹고 기념사진을 찍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이 신문은 일본에선 10엔짜리 동전 디자인의 십엔빵이 확산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했다. 지난해 9월 도쿄에서 한국 십원빵을 참고로 해 십엔빵을 개발했고 오사카 등으로 점포를 넓혔다고 한다. 일본 재무성은 빵에 화폐 디자인을 사용해도 문제없다는 입장이라고 이 신문은 설명했다.

 이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 십원빵과 일본 십엔빵 중에선 한국이 원조다. 십원빵이 엄청난 혁신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지역 문화재와 연계한 건 흥미로운 아이디어였다. 일본 10엔짜리 동전에는 11세기 헤이안 시대 사찰인 뵤도인(平等院) 호오도(鳳凰堂)가 새겨져 있다. 이렇게 십원빵과 십엔빵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문화재를 빵으로 만나는 재미도 있다. 평범하지 않고 재미있는 제품이나 콘텐트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펀(fun)한 소비’는 현대 소비 트렌드의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한·일 두 나라 당국의 태도는 정반대다. “문제없다”는 일본 재무성과 대조적으로 한은은 엄격한 규제의 잣대를 들이댄다. 엄밀히 말해 한국은행법에는 십원빵 같은 상품을 금지하는 조항이 없다. 대신 한은은 1999년 자체적으로 정한 ‘화폐도안 이용기준’을 규제의 근거로 제시했다. 십원빵처럼 화폐 디자인을 영리 목적으로 사용하면 ▶위변조 심리 조장이나 ▶화폐의 품위 및 신뢰성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한은의 주장이다.

 한번 차분하게 따져보자. 고액권 지폐는 몰라도 10원짜리 동전 모양 빵까지 위변조를 우려하는 건 지나친 면이 있다. 애초부터 3000원짜리 십원빵을 10원짜리 위조 동전으로 사용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십원빵이 화폐의 품위와 신뢰성 저하로 이어지는 걸까.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십원빵을 좋아하는 소비자가 많아지는 걸 그렇게 부정적으로 봐야 하는 걸까. 오히려 동전에 대한 대중의 친근감을 높이는 기회로 삼을 수는 없었던 걸까.

 이번 일은 단순히 빵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민간에서 새로운 아이디어 상품을 내놨을 때 규제 당국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준다. 공정한 경쟁이나 소비자 권익을 침해하는 게 아니라면 최대한 민간 자율에 맡기는 게 시장원리에 맞다. 앞뒤 사정을 따지지 않고 낡은 잣대를 들이대는 규제 만능주의는 민간의 창의성을 죽이는 행위다. 어쨌든 한은으로선 십원빵은 현행 화폐도안 이용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할지 모르겠다. 24년 전에 만든 기준이 문제라면 시대 변화에 맞게 합리적으로 고쳐 나가는 게 타당한 방향이다.

글=주정완 논설위원  그림=김아영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