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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심포니·추상미술 띄운 CIA, 공산체제 몰예술성 역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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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8호 25면

[제3전선, 정보전쟁] 미국 음악·미술 중흥과 CIA

1949년 3월 25일 반공산주의 시위대가 미국 뉴욕 월도프아스토리아 호텔 앞에서 행진하고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창문으로 뛰어내려라”는 팻말도 보인다. [AP=연합뉴스]

1949년 3월 25일 반공산주의 시위대가 미국 뉴욕 월도프아스토리아 호텔 앞에서 행진하고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창문으로 뛰어내려라”는 팻말도 보인다. [AP=연합뉴스]

냉전기 미·소 정보전은 군사·외교·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치열하게 이루어졌다. 미술·음악 분야도 예외가 아니었다. 소련이 먼저 공세에 나섰다. 1949년 3월 25일 미국 뉴욕의 월도프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세계평화를 위한 문화·과학 회의가 개최되었다. 미국 예술·과학·전문가 협회가 주최한 것으로, 미국과 소련의 지식·예술 교류를 통해 세계평화를 증진시킨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참석자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소련의 음악거장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와 미국 작곡가 애론 코플란드 등 내로라하는 예술인들이 참석했다.  그러나 이 회의는 숨은 주최자가 따로 있었다. 스탈린의 지시로 소련공산당 국제조직인 코민포름이 배후에서 조직한 행사였다. 스탈린이 쇼스타코비치를 강제로 참석시킨 것은, 후일 쇼스타코비치가 회고록 『증언』을 통해서도 밝혔듯이 소련에 훌륭한 예술가들이 많다는 것을 과시하여 공산주의에 대한 호의적 정서를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회의 내용도 평화증진과는 거리가 있었다. 참석자들은 미국의 반(反) 공산주의 정책이 소련에 대한 증오를 증폭시켜 세계를 불안으로 몰아가고 있다며 당장 멈추라고 주장했다. 코민포름은 그해 4월 20일 파리에서도 세계평화회의를 개최하여 미국을 전쟁광 또는 문화예술의 변방국가로 비난하는 등 노골적인 공세를 펼쳤다. 뿐만 아니라 소련의 이념공세에 영향을 받은 유럽 좌파의 미국 공격은 도를 넘고 있었다. 미국 자본주의는 천박하고 이기심에 가득 찬 체제이며, 문화·예술의 역사가 짧은 미국은 장구한 인문학적 정신을 가진 유럽을 지도할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다.

록펠러 이사장에게 몰래 도움 요청도

잭슨 폴록의 대표작 ‘가을의 리듬’. [사진 최성규]

잭슨 폴록의 대표작 ‘가을의 리듬’. [사진 최성규]

미 중앙정보국(CIA)은 이를 두고만 볼 수 없었다. 미국의 약점인 짧은 문화예술 역사를 공격하는 소련의 선전을 무력화하지 않을 경우, 2차 대전이후 자리 잡고 있는 미국의 국제적 리더십이 흔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즉각 대응에 나선 CIA는 먼저 조직 체계부터 갖췄다. 비밀공작 실행 근거를 명시한 국가안보법 제102조와, 공산주의 차단을 CIA의 주요임무로 명시한 NSC정책지침 10/2호에 따라 이 임무를 전담할 CIA내 정책조정실(OPC)과 국제기구과(IOD)를 신설했다. 또한 소련의 코민포름에 대응하기 위해 1950년 6월 전 세계 자유주의 지식인과 예술인들로 구성된 세계문화자유회의(CCF) 단체도 전격 출범시켰다. 지성·예술계에 대한 공산이념의 침투를 막는 전위대 역할을 맡기기 위해서였다. 특히 유럽과 철저한 공조를 통해 하루빨리 미국의 문화예술 잠재력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도록 견인하는 전략도 마련했다. 준비를 마친 CIA는 지체없이 움직였다. 첫 작품은 1952년 4월 1일 파리에서 개최된 ‘20세기 걸작의 향연’ 제하의 대형 예술 페스티벌이었다. CCF를 내세워 개최한 이 행사는 미·유럽간 최초의 문화예술 공동행사였다. 자유세계의 수준높은 문화예술을 과시하여 소련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이 행사에서는 미국의 음악 잠재력을 세계적 반열에 올려놓는데 많은 신경을 썼다. 그래서 페스티벌의 서막을 미국 보스톤심포니 오케스트라에게 맡겼다. 보스턴심포니는 거장 피에르 몽퇴의 지휘 하에 소련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관현악곡 ‘봄의 제전’을 연주했다.  프랑스 대통령 뱅상 오리올 내외가 찬사를 보낸 것은 물론 작곡가 스트라빈스키까지 이 연주를 높이 평가했다. 당시 언론도 참석자들의 박수가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연설보다 더 컸다고 호평했다. 이 같은 찬사에 힘입어 1954년 4월 로마에서 또 다시 ‘20세기 국제음악대회’를 개최하여 미국의 음악 수준과 역량을 유감없이 펼쳐보였다. 이 같은 행사를 통해 음악을 이용한 소련의 공격을 무난히 방어할 수 있었다.

냉전 초기 ‘문화정보전’을 이끈 앨런 덜레스 CIA 국장. [사진 최성규]

냉전 초기 ‘문화정보전’을 이끈 앨런 덜레스 CIA 국장. [사진 최성규]

음악쪽에서 소련의 공세를 막아내는 데 성공한 CIA는 미술계에서 역공에 나섰다. 당시 소련의 국가적 미술양식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었는데, ‘미술은 모든 사회현실을 인민들에게 사실적으로 전달하여 혁명완수에 기여해야 한다’는 정치적 지침에 따라 탄생했다. 따라서 그림의 수준은 노동자·농민들을 이상화하여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정형화되고 정치화되어 있어 예술적 심미성(審美性)이나 창작혼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공산체제의 억압성과 예술적 후진성을 부각시킬 수 있는 좋은 공격 포인트였다. 반면, 당시 미국에서 갓 선보인 추상표현주의는 캔버스 위에서 작가의 자유로운 생각을 마음대로 표현하고 있어, 자유민주주의 가치와 이념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추상표현주의는 유럽의 전위미술보다 더 전위적이고 실험적이기 때문에 그간 유럽화단으로부터 삼류라고 경시되었던 미국 화단을 현대미술의 중심무대로 성장시킬 수 있는 잠재력도 있었다. 이에 CIA는 추상미술이 하루빨리 세계적 수준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넬슨 록펠러 이사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록펠러 이사장(후일 제 41대 미국 부통령)은 당시 민간에서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흔쾌히 승낙했다. 다만, CIA의 개입이 알려질 경우 미술가들의 반발을 불러 올 수 있어 협조관계는 비밀로 유지했다. CIA는 CCF와 MoMA를 내세워 유럽 순회전시부터 추진했다. 1952년 파리에서 열린 ‘20세기 걸작의 향연’을 필두로 1955년 로마에서 열린 ‘젊은 화가들전’과 ‘미국 현대미술전’이 호평을 받으면서 순항했다. 이 같은 호평을 토대로 개최된 ‘새로운 미국 회화전’은 1958~59년 베를린·밀라노·파리·런던 등 유럽 주요도시를 장기 순회하면서 추상미술을 국제미술계의 새로운 양식으로 발돋움시켰다. CIA의 추상미술 띄우기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국제적 관심을 더 끌기 위해 넬슨 록펠러 등 미술계 큰손들이 고가로 구매해 주도록 당부했다. 대표적 추상화가인 잭슨 폴록의 ‘가을의 리듬’은 1957년 당시 최고가인 3만 달러에 판매되었다. 오늘날 잭슨 폴록의 작품은 2억 달러, 윌렘 드 쿠닝의 작품은 3억 달러에 이를 정도이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미국 추상미술은 세계 미술계의 중심에 섰다. 미술계의 예술 혼과 열정의 소산이지만 미술을 냉전의 무기로 활용한 CIA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CIA는 국가의 통제없이 개인의 미적 감각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는 추상미술을 자유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CIA, 폴록·드 쿠닝 작품 고가 구매 주선

그래픽=남미가 기자 nam.miga@joongang.co.kr

그래픽=남미가 기자 nam.miga@joongang.co.kr

문학·음악·미술을 통해 공산주의의 허구성을 보여주려 한 CIA의 문화정보전은 대체로 성공했다. 유럽과의 공조를 통해 미국의 문화예술 잠재력이 세계에 잘 알려질 수 있도록 훌륭하게 안내했으며, 추상미술의 창의성과 자유정신을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과 대칭적으로 비교시켜 공산주의 미술의 몰개성과 몰예술성을 더욱 부각시켰다. 그 영향은 공산체제의 비교열위로 이어졌다. 특히 이 과정에서 구축한 미·유럽간 문화연대는 미국과 유럽이 대서양으로 갈라진 것이 아니라 대서양으로 연결된 문화적 공동체라는 관념을 만들어 냈으며, 이는 문화예술을 이용해 미국과 유럽을 이간하려는 소련의 전략을 막는데 기여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안보동맹의 빈틈을 메워주었다는 점에서 ‘문화적 NATO’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물론 CIA의 문화정보전에 대한 비판과 논란도 많다. CIA의 배후지원은 문화예술인들의 영혼과 도덕적 권위를 추락시킨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CIA가 문화예술 분야에 얼마나 관여했는지도 논란이다. 냉전 시기 미국의 정보활동 실태를 조사한 1976년 ‘처치위원회보고서’는 CIA가 노동계, 대학가, 문화예술계에 침투한 공산세력을 막기 위해 엄청난 역량을 투입했으며, 이 과정에서 문화예술단체 지원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CIA가 깊이 개입했음을 말해준다. CIA의 문화정보전 평가도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안보적 관점에서 보면 비판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상〉편에서 말한 것처럼 당시 미국은 공산주의와 싸움을 위해 미국의 자긍심인 ‘페어플레이’ 정신마저 잠시 내려놓자고 호소할 정도로 심각하게 보았다. 이 상황을 수긍하면 CIA의 문화정보전은 이해가 될 것이다. CIA는 그 임무와 각오에 대해 홈페이지에 “우리는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며,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간다”고 적어 놓고 있다. CIA의 문화정보전을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실마리이다. 특히 이 문구에 눈길이 머무는 것은 미·중 경쟁의 시대를 맞아 미국의 정보활동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증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최성규 고려대 법학연구원 전임연구원. 국가정보원에서 장기간 근무하며 국제안보 분야에 종사했다. 퇴직후 국내 최초로 비밀 정보활동의 법적 규범을 규명한 논문으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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