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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나 있어라?…해변 휠체어로 달린 네 친구 '무장애 여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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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산성이 바다에 빠뜨린다. 자 가자.”

장애인 2명·비장애인 2명으로 구성된 2000년생 동갑내기 4인방이 완도 명사십리 해수욕장에서 질주본능을 선보였다. 비장애인 박소현‧이선영씨가 해변 전용 특수휠체어를 힘껏 끌었고, 그 위에 올라탄 지체장애인 박산성씨는 두 팔을 벌려 바다에 몸을 맡겼다. 지체장애인 유승주씨도 밝은 미소와 함께 바다로 뛰어들었다. 서로에게 물을 뿌리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놀았다. 산성씨가 바닷물을 많이 먹어 짜다고 호소할 정도였다. 4인방이 지난 7일부터 9일까지 다녀온 무장애 완도‧여수 여행의 한 페이지였다.

지체장애인 박산성‧유승주(23)씨와 비장애인 박소현‧이선영(23)씨가 지난 7일 전남 완도 명사십리 해수욕장을 찾아 바다를 향해 뛰어들었다. 이들은 2000년생 동갑내기 친구다. 이찬규 기자

지체장애인 박산성‧유승주(23)씨와 비장애인 박소현‧이선영(23)씨가 지난 7일 전남 완도 명사십리 해수욕장을 찾아 바다를 향해 뛰어들었다. 이들은 2000년생 동갑내기 친구다. 이찬규 기자

이들은 장애인 차별을 해소하고자 처음 만났다. 조선대 재학생인 승주씨가 대학 강의실에 혼자 앉아 있는 모습을, 같은 학교에 다니던 소현씨가 보고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이 의기투합해 동아리 ‘블렌딩(Blending, 서로 다른 원두를 섞어 좋은 맛과 향을 얻기 위한 커피 만드는 과정)’을 만들었다. 승주씨는 “장애인이란 이유로 동아리 가입신청을 거절당한 적이 있다”며 “블렌딩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조화롭게 어울려 하나 되는 문화를 만들기 위한 동아리”라고 말했다. 머지않아 함께 조선대에 다니는 선영씨가 합류했다. 놀이공원에 가기 위해 동아리 회원 수를 짝수로 맞추기로 한 셋은 승주씨의 고등학교 친구인 전남대생 산성씨를 불렀고, 4인방이 완성됐다.

가장 늦게 들어온 산성씨가 여행을 먼저 제안했다. GKL사회공헌재단(이사장 정진섭)의 지원을 받아 장애인도 여행이 가능하다는 콘텐트를 만들기로 의기투합한 것이다. 승주씨는 “‘장애인은 집에 있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여행은 편견을 깰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2000년생 동갑내기 친구들이 여수 오동도를 찾아 자전거를 탔다. 박산성(23)씨는 자전거를 탈 수 없었지만 전동 휠체어로 다른 친구들과 오동도를 한 바퀴 돌았다. 이찬규 기자

2000년생 동갑내기 친구들이 여수 오동도를 찾아 자전거를 탔다. 박산성(23)씨는 자전거를 탈 수 없었지만 전동 휠체어로 다른 친구들과 오동도를 한 바퀴 돌았다. 이찬규 기자

편견 타파를 위해 여행을 선택한 건 그만큼 이들에게 여행이 어려웠던 기억 때문이다. 2월 일본 여행을 간 승주씨는 수동휠체어에 장착하면 전동휠체어로 만들어주는 전동화키트를 대여하고자 했다. 전동휠체어는 항공, 선박 등에 실을 수 없어 여행 시에는 수동휠체어를 챙겨야 해서다. 하지만 거주지인 광주 인근엔 대여점이 없었다. 승주씨는 “대여점이 서울, 부산, 경주, 제주 등 4곳에만 존재한다”며 “부산항이 있는 부산에서 빌리려고 했지만 수량이 한정적이었다. 전동화키트를 빌리려고 광주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동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고 전했다.

올해 2월 취업 고민으로 홀로 제주로 향한 산성씨 역시 4박 5일 동안 제주의 맛집과 책방을 돌았지만, 활동은 주로 실내로 국한됐다. 산성씨는 “한라산이나 해변 등 외부 장소로 이동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비장애인처럼 자유롭게 혼자서 다양한 것을 체험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을 풀기라도 하듯, 지난 7~9일 여행 기간 두 사람은 장애인도 불편함 없이 이동 가능한 '열린 관광지'에서 활동적인 체험을 했다. 여수 오동도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커플자전거를 타고 섬을 돌았다. 모노레일, 케이블카, 유람선 등을 탑승하며 자연경관을 즐겼다. 숙소에 돌아가선 홍초 소주, 서대회무침과 함께 각자 연애와 취업 고민을 나누며 일정을 마무리했다.

2000년생 4인방은 지난 8일 여수 크루즈선에 탑승했으나 휠체어를 끌고 불꽃놀이, 마술쇼를 볼 수 있는 3층으로 이동할 수 없었다. 이선영씨가 박산성씨를 부축해 계단을 올랐다. 이찬규 기자

2000년생 4인방은 지난 8일 여수 크루즈선에 탑승했으나 휠체어를 끌고 불꽃놀이, 마술쇼를 볼 수 있는 3층으로 이동할 수 없었다. 이선영씨가 박산성씨를 부축해 계단을 올랐다. 이찬규 기자

하지만 친구 2명이 동반한 이번 여행에서도 장벽은 여전했다. 크루즈는 1층만 통행이 가능했다. 산성씨가 불꽃놀이와 마술쇼를 보기 위해서는 선영씨의 부축을 받아 높은 계단을 올라야 했다. 장애인 화장실도 없었다. 그나마 있던 화장실도 높은 성인 남성 무릎 높이의 턱이 있어 산성씨는 이용이 어려웠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 안내 시스템이 먹통인 곳도 있었다. 4인방은 집라인을 예매하기 위해 전화했지만, “장애인이면 이용이 불가하다”는 이야기만 돌아왔다. 승주씨는 “같은 장소에서 집라인을 탔었다. 장애인이란 이유로 보지도 않고 안된다고 해서 슬펐다”며 “아직 장애인 혼자서 여행하기엔 제약이 크다”고 말했다.

지체장애인 박산성‧유승주(23)씨가 완도타워 장애인 주차구역 규격이 맞는지 확인했다. 확인 결과 모두 규격에 맞았다. 이찬규 기자

지체장애인 박산성‧유승주(23)씨가 완도타워 장애인 주차구역 규격이 맞는지 확인했다. 확인 결과 모두 규격에 맞았다. 이찬규 기자

그래서일까. 4인방은 폭우를 맞아가면서도 줄자로 장애인이 이용하는 데 문제가 없는지, 규격엔 맞는지 등을 확인하며 열린관광지 촬영에 몰두했다. 엘리베이터 버튼 위치 등 사소한 부분도 놓치지 않고, 장애인 입장에서 문제의식을 따져봤다. 팀장인 산성씨가 촬영 구도를 세세하게 디렉팅했고, 브이로그를 올린 경험이 있는 승주씨가 다음달까지 영상 편집을 맡는다. 산성씨는 “장애인이 불편함 없이 여행 가능한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며 “누구든 평범한 여행을 다닐 수 있게 열린관광지를 활성화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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