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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경호의 시시각각

‘탐욕인플레’라는 허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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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그저 만만한 게 기업이다. 기업의 탐욕이 물가를 끌어올렸다는 ‘탐욕인플레이션’ 주장이 나라 안팎에서 쏟아졌다. 지난달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원재료값 하락에도 내려가지 않는 라면값에 불만을 표했다. 물론 정부가 개입할 일이 아니라 소비자단체가 나설 일이라고 말은 점잖게 했다. 눈치 빠른 기업은 즉각 반응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지난주 탐욕인플레에 동조하는 분석을 내놨다. 최근 1년간 유럽 인플레이션의 45%는 기업의 이윤 추구가 원인이라고 했다. IMF가 일부 기업의 과도한 가격 책정을 비판해 온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편을 든 셈이다. 라가르드는 2011~2019년 8년간 IMF 총재를 지냈다.

원인·결과 혼동한 고물가 기업 탓
재정·통화정책 정상화가 정공법
정부 구두개입 관행부터 고쳐야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신호에 ‘탐욕인플레는 말도 안 되는(nonsense) 아이디어’라는 비판 기사를 실었다. 요지는 이랬다. 미국은 코로나19 기간에 국내총생산(GDP)의 25% 이상을 세 차례에 걸쳐 대부분의 가계에 현금으로 쐈다. 민간에 돈은 넘쳐나는데 연방준비제도(Fed)는 뒤늦게 금리 인상에 나섰다. 상품 수요는 많고 공급망 충격으로 공급은 달리니 가격과 이윤이 올라갈 수밖에. 유럽은 미국만큼 재정을 쓰지는 않았지만 최근 에너지 보조를 위해 GDP의 3.3%를 쏟아부었고, 기준금리는 여전히 낮다. 이렇게 재정을 많이 풀고 통화를 덜 조인 탓에 물가가 오른 건데, 왜 애꿎은 기업 탓을 하느냐. 한마디로 인플레의 원인과 결과를 혼동했다는 거다. 미국의 탐욕인플레 주장은 팩트에 무너졌다. 물가 급등세에도 기업 이윤이 오히려 하락했다. 유럽의 기업 이윤도 줄어들 것으로 이코노미스트는 예상했다.

여간해서 잘 떨어지지 않는 끈적끈적한 근원 물가가 요즘 주요 중앙은행의 고민이다. 전체 물가는 떨어졌지만 석유류와 농산물을 제외한 근원물가는 여전히 높다. 벤 버냉키 전 Fed 의장과 올리비에 블랑샤르 전 IMF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지난 5월 공동 논문에서 노동시장에서 사람 구하기가 힘들어 임금이 오르고 이 때문에 고물가가 끈질기게 유지된다고 분석했다. 긴축이 더 필요하다는 얘기다. 지난달 말 제롬 파월 Fed 의장이 “2% 물가로 복귀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한 것도, 며칠 전 라가르드 ECB 총재가 “(금리 인상을) 중단할 수도, 승리를 선언할 수도 없다”고 발언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도 6월 소비자물가가 21개월 만에 최저인 2.7%까지 하락했지만 안심하기엔 이르다. 미국 등 주요국 기준금리가 더 올라가면 3회 연속으로 금리를 동결한 한국은행의 고민이 깊어질 것이다. 정부도 건전재정을 강조해 온 정책 기조에 맞게 내년 예산안을 내놓아야 한다. 물가전선에서 괜한 기업 탓 말고 재정·통화정책에 빈 구멍은 없는지 따져봐야 한다.

윤석열 정부가 ‘이명박(MB) 정부 2기’ 같다고들 한다. ‘그때 그 사람’이 다시 중용되는 것도, ‘내가 (사장을 혹은 수사를) 해봐서 아는데’ 식의 만기친람(萬機親覽)형 대통령 스타일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적어도 MB식 물가관리 실패만은 되풀이하지 말았으면 한다. 거시정책은 놔두고 개별 물가를 압박하는 미시대책으로 일관하면서 정책 후유증이 컸다.

수요·공급에 따라 가격이 오르내리고, 달라진 가격에 수요·공급이 다시 반응하는 게 시장 메커니즘이다. 가격에 민감해야 활력 있는 시장이다. 한데 우리 시장 참여자들은, 특히 기업은 가격보다 당국의 심기에 더 민감하다. “기름값이 묘하다”고 MB가 한마디 하자 대대적인 정부 조사가 이어졌고, 결국 정유사들은 일제히 가격을 내렸다. 우리 기업이 가격 경쟁에 둔감하다면 정부의 이 같은 구두개입 관행과 그에 따른 학습효과가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정부의 뜻은 어쨌든 관철됐다. 과거에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민간 주도의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표방하는 윤석열 정부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