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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학위 1호'도 갔다…檢 포렌식 수사관 빨아들이는 로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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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디지털 증거에 대한 포렌식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로펌과 기업이 검찰 출신 포렌식 수사관 쟁탈전에 돌입했다. 일부 로펌의 포렌식 기술과 장비는 검찰 수준과 대등하거나 능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검찰 입장에선 수사 환경이 악화하는 가운데 수사인력 이탈까지 막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로펌·기업 향하는 포렌식 수사관들

그래픽=김영옥 기자

그래픽=김영옥 기자

9일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의 퇴직공직자 취업심사 결과를 보면, 최근 3년간 취업심사 대상이 된 검찰 4~7급 공무원 총 25명의 취업(예정) 업체로 김앤장법률사무소, 법무법인 광장, 법무법인 와이케이 등 주요 로펌이 다수 포진돼 있다. 특히 올해 6월까지 총 10명이 법무법인 와이케이 전문위원 취업(예정) 심사 대상에 올라있다. 이 가운데 상당수가 포렌식 수사관들이라는 게 법조계 안팎의 설명이다.

지난해 한 검찰총장 출신 변호사는 회계·포렌식 전문회사를 만들면서 20년 경력 안팎의 검찰 포렌식 전문가 4명을 영입했다. 이 중엔 국내 1호 디지털포렌식 분야 박사학위를 받은 수사관도 포함됐다. 해당 회사는 한 대형 로펌의 포렌식 업무를 사실상 위탁받아 수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 로펌의 전직 수사관 출신 포렌식 위원은 “검찰 수사관이 대형 로펌으로 직행하면 취업 심사에 걸리기 때문에 신생법인을 만들어서 나가는 경우도 있다”며 “(취업 제한) 3년이 지나 대형 로펌으로 다시 이직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로펌 가면 몸값 오르는데, 검찰과 기술 차이 없어”

검찰 수사관들이 압수수색 후 압수품을 들고 나오고 있다.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 없음. 뉴시스

검찰 수사관들이 압수수색 후 압수품을 들고 나오고 있다.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 없음. 뉴시스

법무법인 율촌은 지난해 검찰 포렌식 수사관 2명을 영입해서 자체 디지털 포렌식 센터를 만들었다. 법무법인 세종도 2020년 기존 포렌식팀을 ‘세종 디지털포렌식센터’로 확대 개편하면서 검찰·경찰 등에서 포렌식 전문가들을 영입했다. 김앤장법률사무소의 디지털포렌식·디스커버리 그룹은 140명 이상의 인력을 갖춰 국내 포렌식팀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평가받는다. 법무법인 태평양 역시 2020년 포렌식팀을 ENI(E-discovery & Investigation)팀으로 개편하고 100여명 수준의 인력을 갖췄다.

한 검찰 수사관 출신 로펌 포렌식 위원은 “장비나 기술력, 업무량 면에서 검찰에 있을 때와 큰 차이를 못 느꼈지만, 몸값은 훨씬 올라가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돈을 더 주니 옮긴다는 얘기다.

대형 로펌의 한 전문위원은 “꼭 형사 분야가 아니더라도 기술유출 사건 등 기업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로펌 포렌식 센터에 의뢰하는 경우도 많다”며 “수사를 의뢰하는 대신, 기업 내부적으로 유출자를 찾아내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영미법계 국가의 경우 민사소송 사전 심리 단계에서 소송 당사자가 상대방 혹은 제3자의 디지털 증거를 수집할 수 있도록 하는 ‘e-디스커버리(증거개시)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데, 이 역시 로펌이 경력직 수사관을 적극 영입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2019년 LG화학이 미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제기한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분쟁에서도 태평양과 김앤장이 SK 측의 e메일에서 증거인멸 정황을 밝혀낸 게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檢, 포렌식 수사 폭증하는데 인력은 로펌보다 적어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반면 로펌의 역량 강화에 대처해야 하는 검찰로서는 인력 확충이 절실한 상황이다. 검찰에 따르면 검찰의 디지털 증거 압수수색 및 분석 건수는 지난해 9612건에 달했다. 전국 검찰청의 포렌식 수사관 수는 지난해 기준 78명으로, 수사관 1명당 연간 123건이 넘는 압수 수색과 분석 작업에 투입되는 셈이다. 올해 상반기엔 압수수색과 증거분석 건수가 5762건인데, 이는 지난해 상반기(2481건)보다 2.3배 늘어난 수치다.

한 검찰 관계자는 “인원과 예산을 늘리고 싶어도 법무부·행정안전부·기획재정부 등의 의사결정을 거쳐야 해 쉽지 않다”며 “더욱이 코로나19 당시 업무실적이 줄어 올해는 예산이 더 많이 깎였다”고 말했다. 매년 업데이트해야 하는 포렌식 소프트웨어 관련 비용도 1개당 4000만원을 넘는다고 한다.

또 다른 검찰 관계자는 “피의자들이 예전처럼 검찰 진술에 협조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디지털 증거의 비중이 더 커지고 있다”며 “하지만 문서와 같은 실물 증거와 달리 포렌식은 취득 절차도, 증거능력 판단 기준도 까다로운 게 난관”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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