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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스 프리즘] 한국 외교 비상 막는 ‘중력의 영’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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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7호 30면

권기창 전 주우크라이나 대사

권기창 전 주우크라이나 대사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의 대표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에서 인간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야 하는데, ‘중력의 영(spirit of gravity)’이 자꾸 인간을 아래로 끌어당겨 날지 못하게 만든다고 했다. 중력의 영은 인간이 갖고 있는 선입관, 관습, 낡은 도덕 같은 것을 말한다. 니체는 높게 날 줄 아는 사람이 자기 자신과 삶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중력의 영을 떨쳐내고 자유롭게 비상하라고 했다. 중력의 영이 우리를 아래로 끌어내릴 때, 그걸 깨닫지 못하면 비상할 수 있는 때를 놓치게 된다. 현재 한국 외교가 그러하다.

이제는 국력 걸맞는 외교 펼칠 때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방문 필요

우리 외교의 비상을 가로막는 중력의 영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의 약소국 정체성과 피해의식이다. 오랫동안 우리는 주변 강대국들의 눈치를 보는 외교를 해왔다. 2021년 우크라이나가 키이우에서 개최한 크림 플랫폼 정상회의 시 현지대사가 본부 고위급인사 대신 참석하려 했으나 러시아의 반대로 포기했다. 러시아가 불법점령한 크림반도 내 인권침해를 규탄하는 유엔결의안 투표에서는 다른 선진국들과 달리 매년 기권하다가 작년에야 처음으로 찬성했다. 이렇게 중력의 영은 우리 외교정책의 시야를 북한의 안보위협 대응에 국한시키고 한국의 위상에 걸맞은 역할을 하지 못하게 막아왔다.

우크라 전쟁은 우리에게 아주 먼 남의 나라 전쟁이 아니다. 안보는 불가분이라 러시아의 승리로 유럽의 안보질서가 위태로워지면, 동아시아의 안보도 위험해질 것이다. 러시아의 침공에 고무된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동아시아에는 우크라 전쟁보다 훨씬 더 큰 위기가 닥칠 것이다. 그래서 서방은 우리나라에 대(對)우크라 지원과 협력을 기대하는 것이고, 우리의 대우크라 지원이 긴요한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우리나라 외교의 사각지대였다. 지금까지 한국을 방문한 우크라 대통령은 세 명이나 있지만,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한국 대통령은 단 한 명도 없다. 필자가 대사로 부임하여 젤렌스키 대통령을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임기 동안 한국 대통령께서 꼭 우크라이나를 방문해달라고 요청했고, 자신도 조속히 한국을 공식방문하고 싶다고 했다. 올레나 젤렌스카 우크라 영부인도 지난 5월 방한했을 때 윤 대통령을 우크라이나에 초청했다. 그러나 그들의 희망은 아직껏 실현되지 않았다.

리더가 되고 싶다면 리더처럼 행동하면 된다. 우리나라가 G7에 들어가고 싶다면 G7 국가들처럼 행동해야 한다. 전쟁 중 G7 정상들이 키이우를 방문하였듯이, 이제 윤 대통령도 키이우 방문이 필요하다. 윤 대통령의 방문은 우크라 지원을 위한 국제적 연대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가치외교의 상징이 될 것이다. 우리 대통령이 줄 우크라 지원이라는 외교적 선물은 한국기업들의 재건사업 참여를 확대시키는 투자가 될 것이다. 내주 리투아니아에서 열릴 나토정상회담 참석 계기도 좋고, 그 이후라도 무방하다.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서는 전쟁의 대세가 한쪽으로 기울기 전에 가는 것이 좋다. 우크라이나 대반격의 결과로 향후 전황이 우크라이나에 기운다면 대통령의 방문이 그다지 고맙지 않을 것이고, 우크라이나에 불리해진다면 윤 대통령의 방문이 늦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모든 일에는 적절한 때가 있다.

우크라 전쟁이 가져온 새로운 외교 환경에서 한국외교는 약소국의 정체성과 피해의식으로 점철된 중력의 영을 떨쳐내고 이제는 국력에 걸맞게 비상해야 한다. 신냉전이 갈수록 공고해지는 이 시점에서 서방의 민주주의 동맹의 편에 서는 것은 ‘가치외교의 얼굴을 한 국익외교’이다. 그것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한국전쟁 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자국 젊은이들의 희생을 무릅쓰고 파병한 16개국의 가치외교에 보답하는 것이며, 동시에 미래에 대한민국의 주역으로 설 젊은 세대에게 조국에 대한 강한 자긍심을 심어주게 될 것이다.

권기창 전 주우크라이나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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