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정탁의 인문지리기행

사서오경에 빠진 명륜당, 영어·공학 가르친 명륜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한·일 유학교육, 같고도 다른…

김정탁 노장사상가

김정탁 노장사상가

서울 성균관에는 명륜당이 있고, 일본 하기(萩)에는 명륜관이 있다. 하기는 관부연락선 일본 쪽 종착지인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자동차로 약 한 시간 떨어진 해안가의 작은 도시다. 명륜(明倫)은 ‘인륜을 밝힌다’라는 의미여서 이 이름이 들어가면 대개 유학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다. 그런데 명륜이란 간판을 똑같이 내걸었어도 명륜당과 명륜관에서 가르친 내용이 크게 다르다. 서울의 명륜당 교육이 관념 차원에서 머물렀다면 하기의 명륜관 교육은 이론을 넘어서 응용으로 이어졌다.

‘인륜을 밝힌다’는 최고 교육기관
관념과 실용 대비, 양국 미래 갈라

나라보다 개인, 주자 숭상한 조선
해석과 파벌, 권력투쟁으로 변질

무사들에 서양지식 전수한 일본
메이지유신과 산업화로 이어져

경세제민보다 마음공부에 치중

조선 최고의 유학기관인 성균관 명륜당. 왼쪽으로 기숙사 중 하나인 서재(西齋)가 보인다. 그 반대 쪽에 동재가 있다. [사진 김정탁]

조선 최고의 유학기관인 성균관 명륜당. 왼쪽으로 기숙사 중 하나인 서재(西齋)가 보인다. 그 반대 쪽에 동재가 있다. [사진 김정탁]

서울 명륜당 교육이 어째서 관념 차원에서 머물렀을까. 한마디로 사서오경(四書五經) 경전 공부에 빠져서다. 사서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이고, 오경은 『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이다. 게다가 이 경전 공부도 나라를 다스리는 경세제민(經世濟民)보다 개인의 수양을 중시하는 심학(心學)에 치중했다. 이렇게 심학에 몰두한 건 지도층이 수양을 잘해야 나라가 잘 다스려진다는 사고방식 때문이다. 그러니 ‘나라의 길’ 치도(治道)는 소홀히 하고, ‘사람의 길’ 인도(人道)만 강조한 셈이다. 조선조 최대 민생 업적인 대동법이 전국에 실시되는 데 100년씩 걸린 것도 이 때문이다.

조선 선비들이 성현으로 모신 주자.

조선 선비들이 성현으로 모신 주자.

이런 관념화된 유학에 더해 주자 해석만을 진리로 여겨서 조선유학은 문제가 더욱 심각했다. 주자 해석에 이의를 제기한 선비를 사문난적으로 몰아서 죽이는 일이 생겨날 정도로 조선유학은 권력 투쟁 수단으로 전락해 학문적 순수성을 잃었다. 그래서 조선 중·후기에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으로 실학이 대두하였어도 주류에 편입되지 못하고 변방으로 밀려났다. 또 조선의 선비들이 금과옥조로 받든 『논어』의 『주자집주』는 주자가 과거시험용으로 생계를 위해 쓴 책이어서 본격적인 해석서라기보다 참고서에 가깝다. 그런데도 이 내용을 무조건 신봉했으니 조선유학은 학문으로서 생명력도 잃었다.

더욱이 명륜당에서 공부하는 문사(文士) 출신 예비 관료들에게도 문제가 컸다. 이들은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유학을 익혔는데 명륜당을 중심으로 나란히 펼쳐진 동재와 서재에 자신이 속한 파벌에 따라 편을 갈라서 자신의 생활공간을 정했다. 그래서 한쪽은 노론 유생이 머물고, 다른 쪽은 소론과 남인 유생이 머물렀다. 명륜당에서부터 이렇게 파벌의식을 키웠으니 당쟁이 심해지는 건 당연하다.

학구열 넘쳤던 일본의 무사들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하기(萩)의 명륜관. 유학 기관임에도 세계사와 공학도 가르쳤다. [사진 김정탁]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하기(萩)의 명륜관. 유학 기관임에도 세계사와 공학도 가르쳤다. [사진 김정탁]

반면 하기 명륜관에선 서양 신지식을 습득하느라 무사(武士)들이 똘똘 뭉쳐서 공부에 전념했다. 그러니 근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조선 문사는 줄을 잘 서야 했다면 일본 무사는 오히려 문사답게 학구적이었다.

명륜관은 1719년 조슈번(지금의 야마구치현)의 5대 번주 모리 요시모토(毛利吉元)가 세웠다. 처음에는 유학을 가르치기 위해 세웠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시대의 변화에 맞게끔 교과목을 대폭 개편했다. 이 작업은 1849년 8대 번주 모리 다카치카(毛利敬親)가 기존의 명륜관을 크게 확장해 현재의 장소로 이전하면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새로 이전한 명륜관에선 사서오경에 더해 영어와 세계지리 및 세계사, 심지어 공학도 가르쳤다. 교과목을 이처럼 확대 개편한 건 변화하는 세계사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다. 명륜관의 이런 교육은 결국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주춧돌을 깔았다.

메이지유신은 죠슈번과 사쓰마번(지금의 가고시마현)의 하급 무사들이 일으킨 정변이다. 이 정변으로 250년간 일본을 다스려 왔던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가 무너지고, 새로운 혁명정부가 에도(지금의 도쿄)에 들어섰다. 이때 혁명정부가 집중적으로 추진한 게 산업화를 통한 부국강병이었다. 그래서 혁명의 명분으로 내건 존왕양이(尊王攘夷) 중에 양이, 즉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는 걸 포기하면서 서양 문물을 배우는 데 열심이었다. 이런 작업에 앞장선 사람들이 바로 명륜관에서 교육받은 죠슈번의 젊은 무사들이다.

서양 학문에 눈뜬 요시다 쇼인

명륜당 현판. [사진 김정탁]

명륜당 현판. [사진 김정탁]

죠슈번의 젊은 무사들 가운데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가 그 선두에 있다. 그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함께 메이지유신의 3걸 중 하나이다. 그 밖에도 막부 말기에 풍운아였던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 메이지유신의 원훈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재직 기간 8년으로 역대 최장수 총리를 지낸 가쓰라 다로(桂太郞)가 있다. 이들은 정한론(征韓論)을 실천해 한국인에게 별로 기억되고 싶지 않은 인물들이다. 그런데 박정희가 5·16을 일으키자마자 야심 찬 ‘경제개발계획’을 세운 건 이들의 행동을 본받은 듯싶다.

명륜관 현판. [사진 김정탁]

명륜관 현판. [사진 김정탁]

명륜관은 영국인과 스위스인도 초청해 공학을 가르치는 데 열심이었다. 첨단 공학을 익힌 무사들은 일본 공업의 선구자가 되었다. 일본이 공업화에 착수한 지 50년도 채 안 돼 서구 열강에 버금가는 산업국가가 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일본 공학교육의 주축이었던 도쿄공대(東京工大)도 명륜관에서 시작된 공부학교(工部學敎)가 그 출발점이다. 또 우리나라 산업 현장에서 쓰이는 전문용어 중 상당수가 일본어인 건 이때 일본에 불었던 공업화의 물결 때문이다.

일본 근대화를 설계한 요시다 쇼인.

일본 근대화를 설계한 요시다 쇼인.

명륜관이 공학교육에 일찍이 눈을 뜬 데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교육철학이 있다. 요시다 쇼인은 자신의 고향인 하기에 쇼카손쥬크(松下寸塾)라는 학당을 세웠는데 여기서 공학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학당 학우들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노우에 가오루,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 야마오 요조(山尾庸三), 엔도 긴스케(遠藤謹助)가 영국에 함께 밀항해 산업혁명 현장을 직접 목격하면서 기술을 익혔는데, 이는 스승 요시다의 가르침 때문이다. 일본인은 이들을 자랑스럽게 여겨 ‘죠슈 파이브’라고 부른다.

근대국가 일본의 기초 닦아

일본의 근대 사상가 요시다 쇼인이 세운 쇼카손쥬크 학당. [사진 김정탁]

일본의 근대 사상가 요시다 쇼인이 세운 쇼카손쥬크 학당. [사진 김정탁]

‘죠슈 파이브’는 영국에서 각자의 역할을 분담했다. 리더격인 히로부미는 공업 행정에 관심을 둬 영국에서 돌아오자마자 공부성(工部省)을 설립해 초대 공부장관에 취임했다. 공부성은 광산·제철·철도·전신 등 근대국가 건설에 없어선 안 되는 부분을 총괄했는데 철강업 중심의 공업 국가로 나아가는 데 밑그림을 그렸다. 가오루는 화폐 제조의 기계화에 착수하면서 이토에 이어 2대 공부장관에 취임했다. 마사루는 철도건설 및 기술자 양성에 애썼다. 요조는 기술자 양성을 위한 공부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긴스케는 동전주조의 기계화를 이뤄냈다. 또 와다나베 고조(渡辺蒿藏)는 선박제조의 근대화를 담당했다.

올 3월 1일 성균관대 명륜당에서 열린 ‘2023 신방례(新榜禮)’ 행사. 신방례는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들이 신입생을 환영하는 의식을 말한다. [뉴스1]

올 3월 1일 성균관대 명륜당에서 열린 ‘2023 신방례(新榜禮)’ 행사. 신방례는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들이 신입생을 환영하는 의식을 말한다. [뉴스1]

하기 성하(城下)마을은 물론이고, 요시다 쇼인이 세운 쇼카손주크, 일본 최초의 근대적 금속용해로인 반사로(反射爐), 서양식 군함을 처음 만들었던 조선소는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그래서 하기 일대를 돌아보면 일본이 어째서 이른 시일 안에 공업화를 이뤄내 중국과 러시아와의 전쟁을 차례로 이긴 뒤 구미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가가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논산 돈암서원. [사진 김정탁]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논산 돈암서원. [사진 김정탁]

우리는 2차 세계대전 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국가인데도 이를 알 수 있는 공간이 별로 없다. 이것이 세계에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유산인데도 그만큼 우리의 소프트웨어 의식이 부족해서다.

성균관과 서원이 전하는 말

서양 최초의 대학인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 도서관 입구에는 라틴어로 ‘하나의 지식이 천 명의 생명을 구한다’라는 표어가 있다. 그러니 볼로냐 대학도 실용주의 정신에 따라 설립된 대학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정신이 중세 암흑기를 걷어내고 르네상스를 열었다고 본다. 서양 근대도 ‘가장 좋은 이론이 가장 실용적이다(The best theory is the most applicable)’라는 기초 위에 성립되었다.

반면 성균관 명륜당은 성리학이란 ‘구유학’을 고집한 나머지 실학이란 ‘신유학’을 거부했다. 성균관뿐인가. 전국에 산재한 서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서원 중 일부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인데 서당의 주인공 격인 선비들의 정신적 유산이 오늘날 어떤 감흥을 줄지 궁금하다.

김정탁  노장사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