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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오키나와 독립 부추기나…오키나와 지사 베이징 찾아 선조묘 참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4일 베이징 퉁저우의 류구국 묘소에서 타마키 데니 오키나와현 지사가 참배하고 있다. 사진 환구망

4일 베이징 퉁저우의 류구국 묘소에서 타마키 데니 오키나와현 지사가 참배하고 있다. 사진 환구망

4일 중국을 방문 중인 일본 오키나와현 지사가 베이징 인근의 류구왕국(琉球王國, 지금의 오키나와) 묘지를 찾아 참배했다. 주일 미군기지 반대론자인 타마키 데니(玉城デニー, 본명 야스히로·康裕, 64) 오키나와현 지사는 지난 3일 국수주의 성향의 중국 환구시보와 인터뷰에서 “이른바 ‘대만 사태가 곧 일본 사태’라는 일본 정부의 논조로 오키나와를 전쟁터로 만들 수 없다”고 발언해 파문을 일으켰다. 홍콩과 대만 등 중화권 언론은 타마키 지사의 행보를 놓고 중국이 과거 명·청(明·淸)의 조공국이었던 오키나와의 역사를 활용해 미국과 일본 견제에 나선 것으로 풀이했다. 미·일이 대만 독립이라는 ‘대만 카드’로 중국을 견제하자 미군 기지 반대 여론이 강한 오키나와를 흔들어 일본을 견제하려는 맞불 작전이라는 분석이다.

지난 6월 23일 타마키 데니 일본 오키나와현 지사가 오키나와 전투 78주년 추모행사에서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UPI=연합뉴스

지난 6월 23일 타마키 데니 일본 오키나와현 지사가 오키나와 전투 78주년 추모행사에서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UPI=연합뉴스

환구시보의 5일 보도에 따르면 4일 타마키 지사는 베이징 퉁저우(通州)구 장자완(張家灣)진에 조성된 과거 류구왕국의 묘지 유적지를 찾아 참배했다. 장자완은 과거 명·청 시대 대운하의 주요 항구이자 베이징의 관문 역할을 한 지역으로 류구국 묘소에는 청대 베이징에서 병으로 숨진 류구국 사신·관리·통역관 등 14명이 매장되어 있다. 타마키 지사는 오키나와 풍습에 따라 참배를 마친 뒤 기자들에게 “이곳에 오랫동안 잠든 선조에게 사의를 표했고 동시에 이후 중국과 긴밀한 연계를 계속 유지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중국 관영매체는 타마키 지사의 류구국 묘소 참배를 계기로 일본과 오키나와의 불편한 관계를 부각했다. 쑨자선(孫家珅) 중국사회과학원 일본연구소 연구원은 5일 환구시보에 기고한 칼럼에서 “역사상 류구는 중국의 번속국(藩屬國)이었고 류구 국왕은 여러 세대를 거쳐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았고 사절을 파견해 중국 황제에게 신하를 칭하고 공물을 바쳤으며 중국 연호와 달력을 받드는 등 중국의 정치문화와 사회경제 등 전방위 영향을 받았지만 중국은 류구의 내정을 간섭하지 않고 자치를 허락했다”고 썼다.

또 “일제 강점기 일본은 류구를 ‘제국의 남문’으로 규정하면서 류구는 일본 본토 안전을 지키기 위해 항상 희생해야 했다”며 “현재 주일 미군 총병력은 3만8000명으로 해외 주둔군 중 최대 규모이지만 일본 국토 면적의 0.6%에 불과한 오키나와에 전 일본의 70% 넘는 미군 기지가 집중해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아시아·태평양 혹은 세계정세가 불안정해지면 류구가 가장 먼저 위험에 처할 것을 현지인들은 우려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쑨 연구원은 칼럼에서 의도적으로 현 지명인 오키나와(冲繩)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 류구(琉球)로 표기했다.

4일 베이징 퉁저우의 류구국 묘소에서 타마키 데니(오른쪽) 오키나와현 지사가 환구시보 기자와 자신의 인터뷰가 실린 신문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트위터 캡쳐

4일 베이징 퉁저우의 류구국 묘소에서 타마키 데니(오른쪽) 오키나와현 지사가 환구시보 기자와 자신의 인터뷰가 실린 신문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트위터 캡쳐

타마키 지사는 이번에 코로나19 이후 최대 규모인 80여 명으로 꾸려진 일본 국제무역촉진협회 대표단의 고문 자격으로 중국을 찾았다. 3박 4일 일정으로 지난 3일 베이징에 도착한 대표단의 단장은 협회 회장인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일본 중의원 전 의장이 맡았다.

전날 대표단과 만난 왕원타오(王文濤) 상무부장은 “협회는 계속해서 ‘경제로 정치를 촉진하고, 민간으로 관방을 촉진한다’는 이념을 견지해 중·일 양국이 경제 영역에서 대화와 교류를 강화할 수 있도록 촉진해 주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타마키 지사는 6일 대표단과 별도로 오키나와와 교류가 빈번했던 푸젠(福建)성의 푸저우(福州)를 방문한 뒤 7일 귀국할 예정이다.

중국의 오키나와 흔들기는 지난달 초 시진핑 주석의 발언이 계기였다. 지난달 4일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1면 기사에 시 주석이 중국의 옛 서적을 보관한 국가판본관을 시찰하며 “푸저우 근무 시절, 푸저우에 류구관(琉球館), 류구묘(琉球墓)가 있으며, 오키나와와 교류의 연원이 매우 깊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또 푸젠의 36개 성을 가진 사람들이 오키나와에 들어갔다”고 말했다고 소개했다. 시 주석의 발언이 보도되자 중국 SNS에는 관변 인플루언서를 중심으로 오키나와의 독립을 주장하는 글들이 속속 등장했다.

‘오키나와 카드’는 중화권 언론이 제기한 용어다. 홍콩 성도일보는 5일 “시진핑 주석이 최근 이례적으로 류구(오키나와)와 중국의 연원을 공개적으로 언급하자 외부에서 중국이 일본 견제를 위해 ‘오키나와(류구) 카드’를 어떻게 구사할지 주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중립 성향의 대만 연합보도 이날 “베이징이 돌연 ‘오키나와 카드’를 흔들며 미국과 일본이 최근 빈번하게 사용해 온 ‘대만 카드’ 수법에 반격을 시도했다”고 지적했다.

역사적으로 오키나와는 독립된 류구왕국이었다. 1879년 일본 정부에 병합되면서 오키나와현으로 이름을 바꿨지만 당시 청 나라는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류구국은 린세이고(林世功)를 비밀리에 파견해 실력자 이홍장(李鴻章)을 만나 출병을 요청했으나 이뤄지지 않자 자살했다. 홍콩 명보는 린세이고의 유해가 전날 타마키 지사가 참배한 퉁저우 류구묘에 안치되어 있다고 보도했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대만과 부속 섬들이 일본에 할양되면서 오키나와는 중국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신탁통치를 받은 오키나와는 1972년 일본에 반환됐다. 중국은 지난 2013년 중국사회과학원 소속 학자 장하이펑(張海鵬)과리궈창(李國强)의 “‘시모노세키 조약’과 댜오위다오 문제를 논함”이란 글을 게재하고 센카쿠 제도(중국명 댜오위다오)의 중국 회귀뿐만 아니라 역사상 해결되지 않은 오키나와 문제를 다시 논의해야 할 시점이 됐다고 주장하며 1차 오키나와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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