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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젖 먹고 컸다는 후백제 견훤 표준영정 만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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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면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약 1100년 전 후백제의 왕도였던 전북 전주시가 견훤왕의 표준영정 제작에 나섰으나 정부 인증 전까지 영정 밑그림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지난 5월 남원시가 공개한 새 춘향 영정을 두고 ‘못생겼다’, ‘나이 들어 보인다’ 등 외모 논란이 일자 보안에 더욱 신경을 쓰는 모양새다.

전주시는 3일 “견훤왕 선양 사업으로 표준영정을 제작하고 있다”며 “문화체육관광부에 신청할 영정 초안을 마련하기 위해 1억5000만원 규모의 학술 용역을 발주했다”고 밝혔다. 신라 호족 출신인 견훤(867~936년)은 900년 지금의 전주인 완산주에 후백제를 세웠다.

전주시는 내년 6~7월 영정 초안이 확정되면 문체부 산하 영정·동상심의위원회에 심의를 요청할 예정이다. 영정은 가로 1.5m, 세로 2.2m 크기로 제작할 방침이다. 제작비는 1억~1억5000만원이 추가로 든다.

전주시는 후백제와 견훤왕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아 전주의 문화적 고유성과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초상화를 제작하기로 했다. 실제 고려 중기 문신인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고려를 건국한 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과 달리 후고구려(태봉)와 후백제를 세운 궁예와 견훤은 폭군으로 묘사했다.

반면 학계에선 “새 시대를 열었던 혁명가”라는 반론도 만만찮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융합고고학과 교수는 “후백제 역사는 비록 반세기에 불과했지만, 혈연에 기반한 신라 사회를 해체하고 참여와 기회의 폭이 넓어진 중세사회로 넘어가는 동인을 마련했다”며 “(견훤왕이) 민족적으로 추앙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전주시는 2017년부터 궁예의 표준영정 제작을 추진한 강원도 철원군을 벤치마킹했다. 후삼국 시대를 연 세 인물 중 왕건은 1999년 표준영정이 제작됐고, 철원군은 지난해 11월 권오창 화백이 그린 궁예왕 영정을 민간인출입통제선 내 태봉국 궁예왕 역사공원 사당에 봉안했다.

견훤왕의 표준영정 지정은 민선 8기 우범기 전주시장의 핵심 공약인 ‘왕의 궁원’ 프로젝트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20년간 1조5000억원을 들여 동고산성·전라감영 등 후백제부터 조선에 이르는 전주 문화유산을 역사·관광 콘텐트로 만드는 프로젝트다.

전주시는 정부로부터 표준영정 지정을 받기 위해 “호랑이 젖을 먹었다” “체격과 용모가 뛰어나게 기이했다” 등 견훤왕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최대한 반영할 계획이다. 학계에선 “호랑이상을 가진 60세 왕의 모습을 그려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전주시는 후삼국 시대 복식·미술 자료와 전문가 고증을 거쳐 표준영정 초안을 만든 뒤 화백을 선정할 예정이다. 견훤 후손인 전주 견씨 10~20명의 생김새도 참고하기로 했다. 다만 잡음이 생기면 표준영정 지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영정 초안에 대해 비공개 방침을 세웠다.

표준영정은 영정 난립을 막기 위해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증한 위인의 초상화다. 1973년 도입된 후 고증 문제와 화가의 친일 경력 등 논란이 끊이지 않자 ‘폐지론’도 나온다.

영정·동상심의위 위원인 박현숙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관광·문화산업의 활성화를 위해 지자체 요구를 반영한 표준영정 지정을 활성화할지, 역사적 근거가 희박한 경우 ‘상상의 얼굴’이 될 우려를 감안해 영정 지정을 숙고할지 논의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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