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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년 세월 버텼다, 울산 ‘장수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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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1915년부터 100년 넘게 영업 중인 울산 방어진의 장수탕. 사장인 배옥연 할머니가 손글씨 요금표가 붙여진 접수대에 앉아 있다. 할머니 손님뿐이라 7년 전부턴 여탕만 운영한다. [사진 독자]

1915년부터 100년 넘게 영업 중인 울산 방어진의 장수탕. 사장인 배옥연 할머니가 손글씨 요금표가 붙여진 접수대에 앉아 있다. 할머니 손님뿐이라 7년 전부턴 여탕만 운영한다. [사진 독자]

20년 새 4000여개가 사라질 만큼 ‘목욕탕’ 폐업이 잇따르는 가운데 일제강점기인 1915년 문을 연 한 어촌마을 목욕탕이 100년 넘게 영업 중이어서 눈길을 끌고 있다. 7년 전부터는 여탕만 운영한다. 울산 방어진에 있는 ‘장수탕’이 그곳이다.

지난달 28일 찾은 울산 동구 방어동 장수탕. 기다란 굴뚝이 달린 목욕탕 안으로 들어가자 배옥연(77) 할머니가 유리로 가로막힌 방(수부실·受付室)에 앉아있었다. 입구엔 손글씨로 ‘일반 7000원, 아이 4000원, 달목욕 8만5000원’이라고 적힌 요금표가 붙어 있었다. 배 할머니는 “혼자 운영하는데 시설이 노후해 찾는 손님도 많이 줄었다”며 “남자 손님이 크게 줄어 운영비를 절감하려고 7년 전부턴 남탕은 접고 여탕만 운영하고 있다”고 전했다.

울산지역 문화연구 자료 등에 따르면 100년 목욕탕 출발은 일본인 수산회사인 하야시카네(林兼)다. 방어진에서 사업을 하면서 직원 사택을 여러 채 짓고, 인근에 직원 전용 목욕탕인 ‘하리마야탕(はりまや湯)’을 만든 게 출발이라고 한다.

1910년 전후로 방어진에는 일본인이 대거 이주했다. 1897년 일본인 선박이 처음 좌초돼 방어진에 도착했고, 삼치류가 잘 잡히는 걸 알게 된 후 가가와(香川)현과 오카야마(岡山)현 등에서 어부가 하나둘 들어왔다. 1910년 즈음 30가구 정도였던 이곳에 1940년대엔 일본인만 500여 가구가 살았다. 마을 한 골목엔 일본 지명을 그대로 딴 ‘히나세골목’(日生町)이라는 이름이 나붙었을 정도다. 유곽과 우체국·전당포·금융조합·일본수산 출장소·여객터미널·영화관도 차례로 등장했다. 울산에서 전기도 가장 먼저 들어왔다.

광복 후 일본인이 떠났고, 배 할머니 시아버지인 고 이종기씨가 목욕탕을 넘겨받아 운영했다고 한다. 하리마야탕이 장수탕으로 이름이 완전히 바뀐 건 1960년대 들어 한국에 대중목욕탕 영업 신고 제도가 시행되면서다. 장수탕 영업신고일은 1963년 12월 15일이다. 울산 1호 대중목욕탕이기도 하다.

원래는 목조건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붉은 벽돌로 둘러싸인 모습이다. 1992년 한 차례 개축했기 때문이다. 1층에 탕이 있고, 2층은 가정집이다. 과거 모습 그대로인 건 목욕탕 뒤쪽에 있는 거대한 굴뚝이다.

배 할머니는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 목욕탕이 여기저기에 소개가 참 많이 됐다. 손자가 도서관에 갔다가 ‘할머니 우리 목욕탕이 책에 나오더라’며 신기해하고, 자랑스러워하더라”고 했다.

목욕탕 폐업은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는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1년 1만98곳으로 정점을 찍은 뒤 2010년 8446곳, 2020년 6439곳, 2021년 6286곳으로 감소 추세다. 20년간 37.8%가량 줄었다.

이런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장수탕 100년 유지 비결은 경제적 논리만 따지지 않는 단골이다. 장수탕 손님은 1940년대 방어진에서 태어나 쭉 사는 주민이나 1980년대 방어진으로 시집을 온 주민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목욕비를 내려는 손님과 받지 않으려는 주인이 입씨름할 정도로 정겹다.

물론 장수탕도 운영이 쉽지는 않다. 배 할머니는 “오전 5시면 나와서 목욕탕 문 열고, 오후 7시에 닫는다. 사실 전기요금 등이 부담이 크지만 장수탕이 문을 닫으면 동네 할머니들이 목욕할 곳이 없어지지 않겠나”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자녀가 다들 직장에 다니고 있어서 결국엔 (내가)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가 되면 이 목욕탕도 문을 닫지 않겠느냐”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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