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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료값 내려도 제품값 그대로…‘그리드플레이션’ 도마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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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6호 05면

물가 자극하는 기업 탐욕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라면 업계 선두 농심은 자사 대표 제품인 신라면의 출고가를 이달부터 4.5% 인하하기로 했다. 오뚜기(15개 제품 평균 5%)와 삼양식품(12개 제품 평균 4.7%), 팔도(11개 제품 평균 5.1%) 등도 가격을 낮추기로 했다. 대한제분도 이달부터 ‘곰표 밀가루 중력분 20㎏’ 등 주요 밀가루 제품의 가격을 평균 6.4% 내린다고 30일 밝혔다. 밀가루를 원료로 쓰는 제과·제빵 업체에서도 SPC그룹과 롯데웰푸드, 해태제과 등이 일부 품목의 가격 인하를 결정했다. 한 식품 업체 관계자는 “식품업체 대다수는 영업이익률이 5%에도 못 미치지만, 소비자들의 물가 부담을 고려해서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내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업체들의 가격 인하는 ‘그리드플레이션’(greed+inflation·기업 탐욕에 의한 물가 상승)을 우려한 정부의 압박에 의한 결과다.

식품가격 상승률, 소비자 물가 웃돌아

국내·외에서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에 편승해 이익을 부풀리는 기업 행태가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가격 인상 요인이었던 원자재 가격이 내렸는데 기업들이 상품 가격에는 반영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선 전 세계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있는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그리드플레이션이었다는 주장마저 나온다.

그리드플레이션이 부상하기 시작한 건 물가 상승세가 꺾였는데도 국민 실생활과 밀접한 식료품 가격이 계속 오르면서다. 지난해 7월 전년 동기 대비 6.3%로 정점을 찍었던 국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5월 3.3%까지 둔화했다. 그러나 가공식품은 7.3%, 외식물가는 6.9% 오르는 등 소비자들이 체감하는 물가는 여전히 부담이 큰 편이다. 국내만의 문제가 아니다. 주요국의 물가 상승세가 꺾였지만, 식료품 가격은 계속 상승세다. 영국의 4월 식료품 가격도 19.1%나 상승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치솟았던 에너지 가격이 안정세를 보이고 있지만, 급등한 식료품 가격이 인플레를 다시 부추기는 분위기다.

상황이 이렇자 보다 못한 각국 정부가 ‘반시장적’이라는 비판을 무릅쓰고 직접 시장을 압박하고 나섰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18일 “국제 밀 가격이 하락한 것에 맞춰 기업들이 라면값을 적정하게 내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국내 업체들의 가격 인상이 집중되던 지난해 9~10월보다 밀 가격은 50%가량 떨어졌는데, 제품 가격은 변화가 없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특히 정부가 콕 찍은 라면 가격은 코로나19,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밀 가격이 상승하기 시작한 2년간 20% 이상 올랐다. 하지만 이후 밀 가격이 안정세를 찾아가는 상황에서도 라면 가격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추 부총리가 라면 가격 인하를 언급하자 국내 라면 업체들은 “국제 밀 가격이 떨어졌다는 것만으로 라면 가격을 내리라는 것은 과도한 통제”라면서도 가격을 내리기 시작했다.

지난달 28일 서울 시내에 위치한 대형마트를 찾은 시민이 장을 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8일 서울 시내에 위치한 대형마트를 찾은 시민이 장을 보고 있다. [연합뉴스]

앞서 프랑스·이탈리아 정부도 기업들을 상대로 식료품 가격 인하를 압박하고 나섰다. 대표적인 품목이 유럽 곳곳에서 가격이 급등한 파스타다. 이탈리아에선 지난 4월에만 파스타 가격이 15.7%나 올랐고 프랑스와 독일, 영국 등에서도 각각 21.4%, 21.8%, 27.6% 상승했다. 이에 프랑스 정부는 식품업체들에 “가격을 인하하지 않으면 재정적 제재를 가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이탈리아에선 소비자 단체인 코다콘스가 규제 당국에 가격 담합 가능성을 조사할 것을 요구한 바 있다. 스웨덴 정부는 자국 내 식료품 시장의 90%를 점유하는 상위 3대 소매업체 대표들을 소환해 가격을 올리지 않도록 압박에 나섰다. 스페인은 과격한 가격 통제 대신 필수품에 대한 부가가치세를 모두 폐지하고 식용유와 파스타에 대한 세금을 5%로 절반 낮췄다.

일각에서는 그리드플레이션이 최근 전 세계에서 벌어진 물가 상승의 핵심 동력이었단 지적마저 나온다. 지난 5월 미국 상무부 경제분석국에 따르면 제품 가격 중 기업 이익의 비중은 1970년대 평균 10.9%에서 2020~2022년엔 평균 34%로 급증했다. 반면 같은 기간 인건비(64.9%→50.8%)와 노동 외 비용(23.7%→14.7%) 등 다른 비용은 감소했다. 이를 두고 코로나 19 확산 이후 물가 상승의 가장 큰 원인은 기업 이익 때문이란 해석이 나온다. 앨버트 에드워즈 소시에테제네랄(SG) 글로벌 전략가는 “기업들은 원자재 비용 상승을 가격을 올리고 이윤을 확대하기 위한 ‘핑계’로 삼았다”고 지적했다. 지난달 11일 블룸버그통신이 자사 독자 288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응답자의 90%가 ‘미국과 유럽 기업들이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폭리를 취하고 있다’고 답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소비자 단체, 담합 조사 요구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유럽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필립 레인 유럽중앙은행(ECB)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지난달 24일(이하 현지시각) ECB 팟캐스트에서 진행한 대담에서 ‘그리드플레이션’과 관련한 사회자의 질문에 “기업들의 이익 증가는 인플레이션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선 지난달 26일 지난해 유럽 인플레이션 가운데 절반가량이 기업 이익에서 비롯됐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프랑스 투자은행 소시에테제네랄의 알버트 에드워즈 글로벌 전략가는 최근 “자본주의 시스템이 끝을 보이고 있는 것인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며 그리드플레이션을 비판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는 “최근 1년간 미국 기업들의 이익이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며 “이들이 2020년 코로나19 충에 의한 경기 둔화의 경기 순환적 영향에서 비켜나 이익이 감소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고 꼬집었다.

이유가 어떻든 정부의 시장 개입은 우려할 만한 상황이지만, 전문가들의 반응은 대체로 필요한 조치라는 입장이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원재료 가격이 오를 땐 업체들이 모두 가격을 올릴 수 있겠지만 떨어질 땐 제품 가격을 낮추는 곳이 나와야 정상적인 시장”이라며 “밀가루 가격이 하락해도 가격을 내리는 업체가 없으니 이미 시장의 가격 결정 기능이 훼손된 상태였던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욱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도 “해외에선 인플레이션 문제로 그리드플레이션이 주로 언급되는 반면, 국내에선 대다수의 시장의 3~4개 업체가 경쟁하는 과점적 형태라 공정 거래 문제에 가깝다”며 “독과점적 지위를 이용한 일부 업체가 과도한 이익을 거두더라도 정부가 이를 조사하고 대응에 나서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니 직접적인 언급을 통해 자발적으로 가격 인하를 유도한 건 효율적인 판단”이라고 말했다.

‘시장친화적’ 미국도 2차 대전·오일 쇼크 때 가격 통제 시도

물가 상승기 생필품 가격이 터무니없이 오른 경우 시장친화적이라는 미국에서도 가격 통제 시도가 있었다.

가장 최근 사례는 1970년대 리처드 닉슨 대통령 시절이다. 오일 쇼크로 당시 물가가 연평균 6%에 근접하자 닉슨 대통령은 1971년 8월부터 3개월 간 모든 공산품 가격과 임금을 동결하는 방식으로 시장에 개입했다. 3개월 뒤엔 가격 상한선을 정부에서 제한하는 식으로 통제를 이어갔다.

닉슨 대통령의 이 같은 조치로 물가 상승률은 3%대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부작용도 있었다. 국제 원유 가격은 급등했는데 휘발유 가격을 올릴 수 없다 보니 문 닫는 주유소가 늘었다. 이에 문을 연 주유소에는 긴 줄이 늘어섰고, 돈을 받고 대신 줄을 서주는 사람도 나타나기도 했다.

이보다 더 오래 전인 1941년에도 미국 정부의 시장 가격 통제가 있었다. 당시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로 커피·육류·신발 등 생필품 가격이 급등세를 보이자 그해 8월 미국 정부는 이들 품목에 대해 가격 상한선을 정했다. 이어 생산량을 조정하고 배급제를 도입하는 식으로 수요와 공급을 조절했다. 다만 가격 통제가 길어지자 암시장이 활성화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났다. 1945년 봄 피츠버그 포스트 가제트 소속 기자였던 레이 스프리글은 피츠버그 인근 암시장을 돌며 1t 이상의 불법 육류를 구매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1970년대 이후 경기 침체와 물가 상승이 겹치면서 미국 정부의 가격 통제가 다시 시행된 적은 없다. 물가 상승률이 10%에 육박할 때는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미국 정부는 ‘시장 원리’를 강조해 왔다. 마이클 포크켄더 메릴랜드대 재정학 교수는 뉴욕타임스를 통해 “물가가 고공 행진을 계속해 공급이 정체되고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시장 원리를 통해 자원을 할당하는 것이 정부의 가격 통제나 배급보다 낫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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