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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주정완 논설위원이 간다

대책 없이 무너지는 소아 응급실…지방은 이미 ‘번아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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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주정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밤에 아픈 아이, 어디로 데려가나

주정완 논설위원

주정완 논설위원

지난 9일 오후 5시쯤 경남 양산부산대병원에 있는 어린이병원 지하 1층 소아 응급실. 어린 환자들이 수액을 맞으며 피곤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보호자는 침대 옆에서 걱정스러운 눈길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응급실 모니터를 보니 소아 응급 환자 11명이 치료를 받고 있었다. 정원(여덟 명)을 이미 세 명이나 초과한 상태였다. 절반 가까운 다섯 명은 생후 12개월 이하 영아였다. 태어난 지 1개월밖에 안 된 아기도 있었다. 모니터의 혼잡도 눈금은 가장 오른쪽의 빨간색을 가리켰다. 응급실 혼잡도가 매우 심하다는 뜻이다. 아직 본격적인 야간 진료 전인데도 환자 수용 능력은 벌써 한계를 보였다.

이 병원 소아청소년과의 박수은 교수는 “인근 부산과 울산에 대학병원 여섯 곳이 있지만 사실상 소아 응급실 운영을 중단했다. 그러다 보니 이곳으로 소아 응급 환자가 집중되는 구조”라고 말했다.

전공의 지원율 16%로 역대 최저
경남 등 10개 시·도, 한 명도 없어

지방이 더 심각, 폐쇄·단축 속출
“현재 재난상황, 버틸 자신 없다”

‘24시간 안심진료’ 대선 공약은?
“이런 나라에서 누가 아기 낳나”

기존 전공의 빠지는 내년 말 ‘재앙’

지난 4일 국내 1호 어린이병원인 서울 용산구 소화병원에 주말 휴진 안내문이 붙어 있다. 서울 주요 병원도 소아과 의료진 부족에 시달리지만 지방은 훨씬 열악한 실정이다. [뉴스1]

지난 4일 국내 1호 어린이병원인 서울 용산구 소화병원에 주말 휴진 안내문이 붙어 있다. 서울 주요 병원도 소아과 의료진 부족에 시달리지만 지방은 훨씬 열악한 실정이다. [뉴스1]

이 병원에선 소아과 전문의 여섯 명이 매일 24시간 교대로 근무하며 소아 응급 환자를 돌본다. 박 교수는 “전문의를 한 명 더 늘리려고 지방자치단체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언제쯤 해결될지 모르겠다”고 전했다.

이 병원 3층의 소아 집중치료실도 찾아갔다. 병상은 12개인데 거의 다 차 있었다. 소아과 병동은 코로나19 이전보다 전체적으로 40%가량 축소한 상태였다. 소아 응급 환자를 진료하려면 응급실과 입원실이 긴밀하게 연계돼야 한다. 그런데 소아과 병동의 환자 수용 능력에도 여유가 없었다.

소아 환자들은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의료진이 입원실 주위에서 대기할 필요가 있다. 현장에선 소아과 의료진 부족을 호소한다. 올해 이 병원에는 소아과 전공의(레지던트) 지원자가 아무도 없었다. 교수들도 소아과 병동에서 당직 근무를 돌고 있지만 외래 진료와 연구, 의대생 교육까지 병행하려면 힘이 부친다고 말한다.

전공의 부족은 이곳만의 문제가 아니다. 올해는 부산·경남의 종합병원을 전부 합쳐도 단 한 명의 소아과 전공의도 충원하지 못했다. 인구 650만 명이 사는 지역에서 소아과 전공의 1년차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얘기다.

원래 소아과 전공의 과정은 4년제였지만 지난해 지원자부터 3년제로 바꿨다. 소아청소년과 학회 차원의 결정이었다. 지원자의 부담을 줄여 전공의 지원율을 높이려는 구상이었지만 바닥에 떨어진 소아과 인기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현재 양산부산대병원에는 소아과 전공의 다섯 명이 근무 중이다. 2년차 두 명, 3년차 세 명이다. 이들은 모두 내년 말에 전공의 수련을 마칠 예정이다. 이대로 간다면 2025년부터는 소아과 전공의가 한 명도 없게 된다. 박 교수는 “어떻게든 현재 진료 수준을 유지하는 게 목표지만 그게 너무 어렵다. 내년 말 이후에는 정말 대책이 없다”고 말했다.

100만 도시 창원, 24시간 응급실 없어

지난 11일 ‘소아청소년과 탈출(노키즈존)을 위한 학술대회’에 참석한 소아과 전문의들이 미용시술 등에 대한 강연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1일 ‘소아청소년과 탈출(노키즈존)을 위한 학술대회’에 참석한 소아과 전문의들이 미용시술 등에 대한 강연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양산과 가까운 경남 창원의 소아 응급 진료 환경은 훨씬 심각하다. 인구 100만 명의 대도시인 창원에는 종합병원 세 곳이 있다. 창원경상대병원과 삼성창원병원, 창원파티마병원이다. 이런 종합병원에는 당연히 소아과가 있다. 하지만 창원 지역 종합병원은 소아 응급실 운영을 잇달아 축소하는 상황이다. 신규 소아과 전공의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기존 전공의는 이미 병원을 떠났거나 곧 떠날 예정이기 때문이다. 결국 창원에선 다음 달 이후 밤늦은 시간에 아픈 아이가 생기면 데려갈 병원이 없어질 전망이다.

지난 9일 오후 창원파티마병원을 찾아갔다. 이미 운영을 중단한 신생아 집중치료실에는 인큐베이터(신생아 보육기)나 인공호흡기 같은 미숙아 진료 장비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소아 전용 입원실에도 가봤다. 5인실 한 곳만 운영 중인데 침대가 모두 비어 있었다. 이 병원 소아과의 마상혁 주임과장은 “소아 입원 환자는 밀착 진료를 해야 하는데 의료진이 부족해 감당이 안 된다. 예전엔 한 층의 절반 정도를 소아과가 사용했지만 대부분 성인 환자용으로 전환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는 오후 10시까지 소아 응급실을 운영 중이지만 조만간 폐쇄할 예정이다. 전문의가 응급실 당직을 서야 하는데 다음날 외래 진료에 차질도 생기고 너무 힘이 든다”고 했다.

창원경상대병원은 홈페이지에 7~8월 두 달간 토요일에는 소아 응급실 운영을 중단한다는 안내문을 올렸다. 원래 이 병원에는 소아과 전공의 한 명이 있었다. 그런데 2년간 힘든 수련을 받은 뒤 “아무리 생각해도 소아과는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며 사직서를 냈다고 한다. 이후 전문의 네 명으로 소아 응급실을 운영했지만 그중 한 명이 지난해 말 그만뒀다. 지난 3월부터는 심야 시간대(밤 0시~오전 6시) 소아 응급 진료를 중단했다.

이 병원 소아과의 김재영 교수는 “전문의든, 전공의든 기존 의료진에서 한 명만 빠져도 전체 소아 진료 체계가 흔들리는 구조”라고 말했다. 그는 “지방에 있는 소아과 의료진은 번아웃(탈진) 상태에 도달한 지 오래다. 겨우 버티는 상황이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고 덧붙였다.

이대목동병원 의료진 구속 등 결정타

임현택 대한소아청소년과 의사회장이 지난 3월 소아과 폐과와 대국민 작별인사를 선언하고 있다. [뉴스1]

임현택 대한소아청소년과 의사회장이 지난 3월 소아과 폐과와 대국민 작별인사를 선언하고 있다. [뉴스1]

소아과의 응급 의료 체계가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도 여건이 좋지 않지만 지방은 더욱 열악한 실정이다. 현장에서 가장 심각하게 보는 지표는 급감한 소아과 전공의 지원율이다. 국내 대부분의 종합병원은 전공의 없이 교수나 전문의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특히 소아 응급실이나 입원실에 ‘발등의 불’이 떨어졌다는 게 현장 의료진의 설명이다.

2018년까지만 해도 소아과는 전공의 정원을 채우는 데 문제가 없었다. 2019년을 고비로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2019년 첫 미달을 기록한 이후 매년 지원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올해는 역대 최저인 16%였다. 결국 부산·대구·대전 등 10개 광역시·도는 소아과 전공의 1년차를 한 명도 확보하지 못했다. 현재 전공의 2년차가 수련을 마치는 내년 말에는 대부분의 지방 종합병원에 소아과 전공의가 한 명도 남지 않는다.

의료계에선 두 번의 결정타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첫째는 2017년 12월 서울 이대목동병원 사건이다. 당시 집중치료실에 있던 신생아 네 명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검찰은 담당 교수 등 의료진을 과실치사 혐의로 구속하고 재판에 넘겼다. 이들은 1심과 2심 재판에 이어 대법원에서도 전원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미숙아를 진료했다가 결과가 안 좋으면 의료진이 구속되거나 수년간 재판에 시달릴 수 있다는 점은 의료계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둘째는 코로나19로 인한 동네 소아과 의원의 경영난이다. 평소에는 학교나 학원 등에서 감염병에 걸려 동네 소아과를 찾는 어린이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코로나19가 유행한 기간에는 비대면 수업 등으로 일반 감염병 환자가 대폭 줄었다. 가뜩이나 저출산으로 어린이 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소아과 문을 닫거나 진료 과목을 바꾸는 곳이 속출했다. 김재영 교수는 “그동안 수없이 많은 경고음을 보냈지만 번번이 무시당하면서 소아과 의료 체계는 재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고 말했다.

“피 조금만 나도 소송, 의사들 무력감”

예민한 보호자를 상대해야 하는 감정적 소모도 소아과 의사들을 힘들게 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한 소아과 전문의는 “의사도 결국 사람이다. 열 명 가운데 한두 명에게라도 무리한 요구를 받거나 기본 예의도 없는 ‘보호자 갑질’을 당하면 자괴감이 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맘카페 등에서 일부 회원들이 근거 없는 악담을 퍼뜨릴 때는 정신적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견디기 어렵다”고 호소했다.

임현택 대한소아청소년과 의사회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소아과 전문의한테 귀지 떼다가 피났다고 민·형사소송’이란 제목의 글을 올리기도 했다. 중이염이 의심되는 아이의 귀에서 귀지를 제거한 뒤 피가 나자 보호자가 의료사고라며 담당 의사를 고소하고 2000만원을 배상하라는 소송도 제기했다는 내용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소아청소년 중환 및 응급질환 24시간 전담 전문의 안심진료 확대”를 공약했다. 당시 윤 후보 캠프에서 보건복지 공약 작성에 참여했던 마상혁 과장은 “소아 중환자와 응급환자의 진료 체계가 붕괴하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고 강조해 공약에 반영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대선 이후 ‘24시간 안심진료’는커녕 기존에 있던 소아 응급실도 폐지 또는 축소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마 과장은 “정부의 무관심과 무대책으로 대선 공약조차 실종돼 버리고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 이런 나라에서 어떻게 청년에게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키우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