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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운찬 칼럼

한국 경제의 카지노화를 경계한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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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

한 국회의원이 청문회 활동은 불성실하게 하면서도 같은 시간에 고액의 코인 거래를 한 것이 들통났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직무유기일 뿐 아니라 국회의 권위와 국가의 품격을 땅에 떨어뜨린 사건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는 이번 사건이 한국경제의 지나친 금융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엄중한 경고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금융부문이 실물부문에 비해 지나치게 비대해지는 경제의 금융화는 산업자본주의를 금융자본주의로 변화시킨다. 금융자본주의는 역사상 거의 예외 없이 국가 경제에 많은 폐단을 만들어내고 끝내는 커다란 재앙을 불러오기도 했다. 이것은 고 조순 선생이 생전에 한국경제를 돌아보며 학술원에 기고한 ‘자본주의 경제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경제운영의 원리’(2015)라는 논문에서 크게 우려한 점이다.

금융이 실물보다 너무 비대하면
금융자산의 가격 거품 조장 우려
결국 대규모 금융위기 부를 수도
핀테크 규제 선제적 개선 나서야

첫째, 지나치게 금융화된 경제는 돈 놓고 돈 먹기 경제, 즉 카지노 경제를 가져오고 금융자산 가격의 거품을 조장한다. 초기 단계에서는 돈 넣은 사람이 돈을 버는 양상이 나타난다. 그 소문은 빠르게 번져가고 투기는 쉽고도 확실한 돈벌이 수단으로 인식되어 너도나도 참가하는 카지노 경제로 발전한다. 돈을 벌 수 있다는 예상이 실제로 돈을 벌게 만드는 거품 특유의 자기충족적 속성은 이 과정에 기름을 붓는다. 그러나 그 종착역은 상승보다 더 빨리 추락하는 거품의 붕괴이며 궁극적으로는 대규모 금융위기를 부를 수도 있다.

지금부터 2~3년 전 우리나라 아파트 가격은 매일 자고 나면 올랐다. 모든 사람이 아파트만을 쳐다보았다. 아파트를 가진 사람은 자산 가격의 증가를 즐기고, 아파트가 없는 사람은 아파트 살 걱정에 잠을 못 이루었다. 결국 돈이 있는 사람은 아파트 사고, 돈이 조금밖에 없는 사람은 영끌해서 사고, 돈이 없는 사람은 개미가 되었다. 일하는 개미가 아니라 ‘동학 개미’, ‘서학 개미’ 말이다. 그보다 더 빨리 돈을 벌고 싶은 사람들은 코인에 투자했다. 전형적인 카지노 경제가 탄생했던 것이다. 카지노 경제는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좀먹는 마약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거의 언제나 지나치게 완화적인 통화정책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다가 바람이 바뀌어서 금리 인상의 한파가 예상되면 거품이 붕괴하는 것이다.

둘째, 경제의 금융화는 실물부문을 위축시킨다. 투자 자금의 물꼬가 실물부문에서 카지노로 바뀌기 때문이다. 금융은 생산성이 높은 기업을 분별해 내고, 그런 기업에게 잉여부분의 자금을 배분함으로써 실물 경제의 효율성을 높인다. 그러나 경제의 금융화가 과도하게 진전되어 카지노 경제의 양상이 나타나면 실물투자로 구현되어야 할 자금이 카지노 경제의 판돈으로 유입될 수 있다.

이것은 투자의 기대수익률을 비교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실물투자로부터의 기대수익률은 시기와 업종에 따라 다르겠지만 연률 20%를 초과하기 어렵다. 그러나 과도하게 금융화된 카지노 경제에서 20%의 수익률은 ‘투자 실패’에 가깝다. 카지노 경제에서 가장 화려한 것은 ‘잭팟’이다. 어느 정도가 잭팟 수익률일까?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코인 투자자들의 대화방을 가 보면 ‘이더리움으로 1000% 수익률을 올렸다’는 인증샷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셋째, 금융자본주의에서는 일반 국민이 경제하려는 의지(the willl to economize)를 하찮게 여기게 된다. 근검, 절약이나 양입제출(量入制出) 등 종래의 사려 깊은 경제원칙은 웃음거리로 전락한다. 금융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탐욕을 통제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가 길러내는 최고의 인재들이 생산성 향상의 좁은 문 즉, 산업기술 부문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탐욕이 유혹하는 투기적 금융부문을 선택할 것이다.

넷째, 경제의 과도한 금융화는 소득과 부의 양극화 추세를 가속한다. 생산성의 향상을 수반하지 않는 머니 게임이 설사 일부 참가자에게 쉽고 빠른 거대한 수익을 가져다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국민 모두를 위한 번영’이 아니라 ‘그들만의 잔치’일 뿐이다. 더 나아가 돈을 버는 과정 자체가 공정하지 않고, 불완전 정보와 기만, 사기가 난무할 수도 있다. 정치 질서가 이런 불법적인 행동들을 제대로 걸러내지 못하면 자본주의(capitalism)는 금권경제(plutocracy)로 전락할 수 있다.

대책은 무엇인가? 금융에서의 자유 방임을 경계해야 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금융의 디지털 전환과 함께 등장한 코인, 디지털 자산 등 핀테크 혁신이 곧 금융의 효율성을 제고하고 공정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금융감독 당국은 시장이 효율적이면서도 투명하고 공정하게 기능할 수 있도록 핀테크 관련 규제 및 제도의 선제적 업그레이드를 통해 소비자·투자자를 보호하고 금융부문-실물부문 간 선순환을 유지, 발전시키는 데 주력해야 한다. 현재와 같은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식 대처로는 카지노 경제의 덫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