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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의 성지’에서 30년…마에스트로가 된 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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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는 박은선 조각가가 서울 논현동 스텔라갤러리 전시에서 신작 ‘확산’을 선보이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는 박은선 조각가가 서울 논현동 스텔라갤러리 전시에서 신작 ‘확산’을 선보이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에서 활동하는 조각가 박은선(58)씨의 개인전이 서울 논현동 스텔라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다음 달 23일까지다. 국내에서 5년 만에 여는 전시인데, 박씨는 이번 전시에서 ‘디퓨지오네(Diffusione, 확산)’를 주제로 한 신작 15점 등 작품 47점을 선보이고 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 도시인 피에트라산타는 세계적으로 ‘조각의 성지(聖地)’로 불린다. 미켈란젤로가 이곳에서 활약했고, 헨리 무어, 호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 등 전설적인 거장들이 작업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1993년부터 그곳에서 거주해온 박씨는 현지에서 ‘마에스트로’로 불린다.

2018년 한국인 최초로 피에트라산타 시가 주는 최고 조각상을 받았다. 지난해 6월 새로 지은 고속도로 진출입 교차로에 그가 만든 높이 11m의 대리석 조각 ‘무한 기둥(Colonna Infinita)’이 세워졌다. 지난해 8월에는 세계적인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64)의 요청으로 보첼리의 고향 라이아티코에서 열린 콘서트 무대에서 ‘무한 기둥’을 선보였다.

최근 한국을 찾은 그는 ‘관객과의 대화’에서 “늘 낭떠러지 끝에 있다고 느끼며 일해왔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순간에 꼭 계단이 하나둘 나타나 나를 버티게 했다”며 “지금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성공한 조각가’로 살아가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확장’(2021).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확장’(2021).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스스로 ‘성공한 조각가’라고 했다.
“피에트라산타는 세계적인 조각가가 몰려 있는 도시다. 거기서 30년간 조각가로 일하고 있으면 성공한 것 아닌가. (웃음). 제가 그 누구보다 유명하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도 그곳에서 행복하게 작업하고 있다는 의미다.”
자부심은 어디에서 오나.
“성공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돈을 굉장히 많이 벌었을 거라 생각한다. (웃음) 그 정도는 아니다. 지난 20년간 이탈리아의 많은 멋진 장소에서 전시를 열 수 있었고, 유럽 곳곳에서 꾸준히 개인전을 해왔다. 아무 걱정 없이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하는 게 성공 아니겠나.”
2016년 피렌체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전시된 조각 ‘무한 기둥’. [사진 박은선]

2016년 피렌체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전시된 조각 ‘무한 기둥’. [사진 박은선]

전남 목포 출신인 박씨는 경희대 조소과, 이탈리아 카라라 국립예술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피에트라산타에서 활동해왔다. 2007년 피에트라산타 시의 제안으로 개인전을 연 뒤 러브콜이 이어졌다. 2014년 로마의 고대 유적지에 자리한 포리 임페리알리 미술관에서 대규모 야외 조각전을 열었다. 2016년엔 피렌체 시의 초청으로 미켈란젤로 광장 등 도시 곳곳에서 작품 14점을 전시했다. 유럽 전역에 그가 제작한 공공 조형물이 20여 점 설치돼 있다.

박씨의 돌 조각은 두 가지 색이 교차하면서 금이 간 듯 표현한 균열이 특징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게 하늘로 솟아오르는 듯한 ‘무한 기둥’이다. 서울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 야외에 설치돼 있다.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연상케 하는 이 기둥은 창공을 향해 상승하는 이미지다. 그의 작품에는 일부러 깨뜨려 만든 돌의 거친 표면으로 바람길처럼 틈이 나 있다. “그 틈과 균열이 내겐 숨통”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깨뜨린 돌을 쌓은 조각이라니.
“예전엔 돌 조각이라고 하면 덩어리 안에서 형태를 찾아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내가 왜 교과서를 따라야 하지’라는 의문이 들더라. 그래서 돌을 앞에 놓고 모두 깬 뒤 깨진 조각을 가지고 조립했다. 그때부터 나만의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 같다.”
2022년 안드레아 보첼리 콘서트 무대의 ‘무한 기둥’. [사진 박은선]

2022년 안드레아 보첼리 콘서트 무대의 ‘무한 기둥’. [사진 박은선]

이번 전시에서 국내에 처음 선보인 연작 ‘확산’은 매끈한 대리석 구(球)가 포도알처럼 매달려 색색의 빛을 내는 형태다. 내부를 파내 8㎜ 두께로 만든 뒤 안에 LED 등을 달아 완성한 둥근 돌은 자체의 고유한 색으로 빛을 뿜어낸다. “빛을 내는 각각의 구를 사람이라 생각했다”는 그는 “코로나19 기간에 작업을 시작했다. 서로 몸을 맞대고 밝게 빛을 내는 작품을 통해 연대와 희망의 얘기를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박씨는 스위스의 세계적인 건축가 마리오 보타(80)와 함께 전남 신안군 자은도에 들어설 조각미술관 ‘인피니또 뮤지엄’ 건립에 참여하고 있다. 보타가 설계를 맡았고, 박씨 작품 다수가 소장된다. 보타는 피에트라산타에 내년에 개관하는 ‘박은선 미술관’(가칭)도 설계했다.

보타와는 어떻게 협업하게 됐나.
“2014년 로마 유적지에서 열린 내 전시에 그가 찾아왔다. 좋아하는 건축가와 기회가 되면 어떤 형태로든 협업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희망을 빨리 이루게 됐다.”
작업을 계속해온 비결은.
“30년 동안 달리기를 해왔다. 최근 몇 달간 바빠서 쉬었지만, 그 전에는 거의 매일 뛰었다. 스트레스 푸는 데 달리기가 최고였다. 뛰면서 정말 많이 울었다. 그렇게 울면서 뛰고 나면 가족에게도 말 못할 스트레스가 씻겨 나갔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작업에만 몰두한 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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